20220225
존엄이란 무엇일까.
지난번 기저귀에 관한 글을 공유하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써본다. 분명 전에도 몇 번 썼던 것 같지만, '존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만 같으니, 열 번 정도 더 한들 뭐 어때.
력사의 죽음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두려움 중에 하나는 존엄의 상실이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고,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컨트롤 가능함을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온몸의 기능이 멈추어 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처음 알게 된 변화는 혀가 굳어가는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이것을 깨달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미묘하게 변해가는 말투에서부터 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본인이 느끼기 시작한 변화는 운신의 불편함이었다. 점점 걷는 것이 쉽지 않아 졌고, 친구에게 지팡이를 빌렸다. 점점 지팡이를 쓰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중에는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든 상황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자주 다리가 아팠고, 붓곤 했다. 다리를 자주 높여주어야 했다.
친구네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그나마 운신할 수 있어 보였던 몸은, 호스피스에 갈 때는 혼자 차에 타고 내리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었다. 지팡이로도 운신이 쉽지 않게 된 순간 들어갔던 호스피스에서 나올 때, 력사는 거의 사실상 혼자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더랬다.
절대 호스피스에 있고 싶지 않다고 하여, 옮겨간 이모집에서 력사는 몸의 운신이 어려울 수 있음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려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이모집에 간 지 하루 만에 다리에 힘이 풀려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나는 외부에서 다른 일을 보고 있었는데, 당장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이모님 댁으로 돌아갔다. 이미 몇 시간째, 력사는 거실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였고, 고령에 나보다 힘도 부족했던 어르신들은 그런 그 아이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력사는 많이 화를 냈다.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옮겨주지 못하는 엄마에게도, 그 순간에 함께 있지 않고 나중에서야 나타난 나에게도 화가 났다. 아마도, 좌절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력사는 거의 확실하게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기저귀를 요청하셨고, 간이 화장실도 필요함을 알려오셨다.
물론, 력사는 거세게 반항하고 항의했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 력사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었던 단 한 가지, 존엄. 화장실에서 혼자 소변을 보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혼자 화장실까지 걷지는 못하지만, 지팡이나 부축으로 화장실까지 갈 수 있었던 터였다.
이모님이 어딘가에서 간이 화장실을 구해가지고 오셨다. (침대 옆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양변기처럼 생긴 의자였다) 력사는 그때부터 소변을 최대한 참기 시작했다. 화장실까지 자주 움직일 수 없으니 안 가고 버텼다가 한 번에 해결을 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딱 두 번 시도 한 화자실 이용은 쉽지 않았고,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세발자국 정도를 떼는 것도, 바지와 팬티를 내리는 것도, 변기에 맞춰 의자에 앉는 것도,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분노하고, 서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력사를 달래고 위안했다. 괜찮다고 백번 말했지만, 나에게도 그건 전혀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력사가 기저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수치스러웠고, 괴로웠고, 무서웠고 슬펐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어떻게 기저귀 사용을 할지를 빠르게 고민한 것은 력사의 어머니였다. 수십 년 전 자식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의 마지막을 겪어봐서 였을까, 아니면 그냥 필요를 잘 깨달았던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결단은 빨랐고 명확했다.
력사는 거절하고 또 거절했다. 화를 내고 또 내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칠십 넘은 엄마 허리로는 너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라고 말하자, 급 체념을 했다.
이 부분도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자신의 존엄을 놓기로 결정한 이유는, 죽어가는 딸을 돌보는 엄마가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과 존엄이라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은 후, 력사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몸이 더 축축 처졌고, 가족들과 나는 력사를 다시 호스피스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전혀 력사의 의지와 관계없는, 보호자들의 판단에 의한 결정이었다.
응급구조사 선생님들이 오고서야 력사에게 "호스피스로 가자"라고 이야기했다. 력사는 크게 항의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력사가 죽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이 코 앞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응급실에 도착해서 산소포화도 검사를 하던 그 순간, 간호사 선생님들이 화들짝 놀라며 산소호흡기를 끼우고, 어떻게 이제 데려왔냐고 어떻게 산소호흡기 없이 버텼냐고 하는 순간 깨달았다. 아. 정말 당장 병원에 데려와야 하는 순간이었구나.
그렇게 들어간 응급실에서 호스피스로 옮기고 며칠을 버틴 후 력사는 하늘로 갔다. 결국 미루고 미루던 소변줄을 끼운 지 채 24시간이 안된 순간이었다.
기저귀에 관한 칼럼에서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다양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늙어간다는 건 꿈과 건강, 사랑하는 이까지 상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이지만 좀처럼 적응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게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자기 통제력인 배변의 통제가 힘들게 되었을 때 이제 아무것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나 수치심이 일어나는 건 당연해 보인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난 아직도 력사가 그 죽음의 순간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력사는 유독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게 사라진 순간 삶의 이유 또한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력사가 느꼈을 그 자괴감과 수치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몸의 존엄이란, 그 정도의 것이다.
그 존엄을 어떻게 함께 지켜낼 수 있었을까는 다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력사가 선택할 때까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것 말고는 전혀 없었다.
우리가 나이가 좀 더 있었다면 혹시라도 그 받아들임이 쉬웠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아닌 것 같다.
나를 내려놓고, 남에게 기대고 맡기는 것이 존엄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소통과 믿음과 교육이 있어야 조금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별개로, 그러한 상황에서도 환자를 동등한 한 인간으로 기억해 주고, 이야기해주고, 말 걸어주는,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어떤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현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며 친구이며 가족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환자의 존엄을 지켜주기도 한다고 믿는다.
력사의 마지막 순간 zoom으로 모였던 친구들이 건네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력사가 존엄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사망할 수 있었던 큰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만드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자기 몸의 통제 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효능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또 다른 것이겠지. 그리고 이것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명확한 것 단 한 가지는, 이 존엄이라고 하는 것은, 나 혼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서로의 삶이 존엄할 수 있도록 바라봐주는, 말 걸어주는, 옆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 지난번에 공유했던 글.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어머니는 기저귀가 싫다고 하셨어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13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