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4
1. 차별금지법 집중 문화제 다녀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묵직한 말들이 계속 계속되고,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는 게 괜히 맘이 참 복잡했다. 끊임없이 간만에 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들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2. 여전히 잘 지내냐, 어떻게 지내냐는 인사가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력사 떠난 후 잘 지내고 있냐는 말로만 들려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잘 지내는 건 맞아서 잘 지낸다고는 하는데, 뭘 물은 거고 뭘 답변한 건지 잘 모르겠다랄까. 여튼 잘 지내니까 진실이고 정답인 건 맞음.
3. 어젯밤에 친구랑 통화하다가 중고책 판매 이야기가 나오면서 새벽 2시에 책장 정리를 했다. 판매 불가능한 (오래된) 책들 빼고, 59권을 골라냈다. 꾸역꾸역. 많이 정리해서 공간을 확보하겠다 다짐하면서 책장을 열심히 훑었지만, 결국 골라낸 건 59권이 전부였다. 59권을 질질 끌어가며 차에 싣고 중고 서점에 갔더니, 곰팡이 핀거, 증정품, 밑줄 쳐진 거, 물에 젖었던 거 등등 빼고 41권을 구매해줬고, 63,400원이 손에 들어왔다. 나머지 책들은 다시 신중을 기해 3권만 남기고 집 앞에 재활용으로 내어놓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책장의 (거의) 모든 책들은 서울에 올라오면서 사기 시작한 거다. 그 전에는 주로 대학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았거나, 더 전에는 엄마가 사주었나? 친구에게 빌렸나? 잘 기억도 안 나네. 여튼 지난 십수 년의 관심사와 역사가 책장에 있었다. 물론 력사의 지난 수십 년의 역사도 있었다. 그 역사, 내가 오늘 많이 버렸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사실 정리한 책의 많은 부분이 력사의 것이라는 게 맘에 걸리기도 하고, 널 사랑하고 너의 관심사와 취향 등등이 좋았지만, 그것이 나의 취향이나 관심사가 아닌 것도 많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아니, 아니라기보다, 력사가 관심을 가졌던 만큼 깊게 관심을 갖게까지는 아니 되더라는 말이 맞겠다.
력사의 역사를 끌어안고 서울까지 올라왔지만, 저 역사를 나의 것으로 하는 것 까진 어려웠나 보다. 사람들과 책을 나누고 나누고 나누었다. 이제는 버려야 할 시점이 온 거겠지. 책을 팔고 버린 게 력사를 버린 게 아니라는 걸 당연히 알지만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은 이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4. 어쩌다 발언을 할 때마다 력사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는데, 너무 또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구구절절 사연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벌써부터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글로 백만 번 이야기했는데 말로 좀 하는 게 뭐가 어떻냐 싶기도 하고, 너무 끼워 붙이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서 언제 또 이만큼 내 파트너 이야기를 그렇게 공개적으로 할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또 괜찮다 싶기도.
력사의 삶이 죽음 후에도 가치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 삶은 앞으로도 계속 가치 있을 건데, 그걸 많은 사람이 오래오래 오래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자료들도 기증하고, 주변에 책도 나누고,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력사는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 쫌 불편해하겠지만, 이게 나의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운동권 언니는 나도 좋아하고 내 활동도 좋아하고 그러니깐 뭐. 괜찮아라. 주도권은 이제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