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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Kim Sep 03. 2020

드디어 풀린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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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지른 실수들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새로 나온 스케줄표에 내가 일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도 점점 사라진다.

내가 발 디딜 자리조차 없는 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보며, 

이미 충분히 많은 직원들이 있는데 왜 굳이 나를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가. 

뒤에서 토니가 내게 소리를 쳤다.


"제시카!!!! 거기서 뭐해! 주방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나가서 바닥이나 쓸어."


그렇다. 청소부로 쓰려고 불렀구나. 다른 직원들 앞에서 그렇게 무안을 주니 황공해서 몸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다.^^

내가 계속 실수를 해대자 청소 외에 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청소하는 게 마음 편하다.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 봐, 또 실수할까 봐 노심초사 안 해도 되니깐.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어쩐 일로 나보고 샌드위치에 넣을 토마토를 썰라고 했다.

그런데 토마토가 하나같이 다 너무 물러 얇게 썰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칼질도 잘하지 못하니까 참 개떡같이 썰어놨다. 여기 터지고 저기 터지고.. 그걸 보고 있자니 마치 속에서 내 심장이 이런 꼴로 도려져 있을 것만 같다. 토니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또 그의 끊임없는 잔소리 버튼이 눌러졌다.  


"ㅈㄹㅈㄹㅈㄹㅈㄹ" (그냥 이제는 지랄로 들림...)


자포자기다. 나는 연신 쏘리라는 말만 한다. 

내 친구 David의 말이 맞았다. 나는 호주에서 꼭 노예 같다. 


서비스직이다 보니 나는 손님들에게 친절했다. 마음은 썩어 문 들어져 가는데도 웃으면서 그들을 반겼다. 

웬일인지 토니가 내게 칭찬을 했다. 손님들에게 인사를 잘한다고.

-999 정도로 내려간 내 자존감이 한 10점 정도 올라간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나는 그에게 한낱 청소부에 지나지 않았다. 토니는 Danny라는 남자 직원에게 에어컨을 분리시켜서 제시카에게 주라 고했다. 그러면 내가 씻을 거라고^^

참 비참하다. 

하다못해 이제는 에어컨 필터까지 씻고 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뭐든지 다 서툴다.

속상한 마음을 애써감 추고 커다란 필터를 씻고 있는데 또 미친 잔소리 대마왕이 옆에 와서 지랄한다.

그렇게 하면 평생 걸린다고.  

'아!!!!!!!!!!!!! 나 좀 가만히 놔둬 진짜'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모르겠다. 

폭발할 거 같다. 다 싫다 정말.


천근만근 무거운 몸과 마음을 억지로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인형과 장난감들이 현관 입구에서부터 나를 반겨준다. 아이들이 헨젤과 그레텔처럼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마킹이라도 하려는 듯,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빼내서 온 집안을 들쑤셔놨다. 

마치 도둑 든 것처럼 어질러져있는 이 집 꼬락서니를 보자니 눈에서 참아왔던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여태껏 청소하다 왔는데 내 유일한 쉼터인'집'에 도착했더니 또 다 내가 치워야 하는, 남들이 어지럽힌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꿈이 뭐였더라? 호주에 왜 왔지? ... 근데 나 여기서 지금 뭐하냐'


카페에서 투잡을 뛰며 일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영어를 쓸 수 있어 좋겠다던 장점은 어느새 단점이 되어버렸다. 

그놈의 영어가 내 기를 죽였고, 자신감을 잃게 해 나를 한순간 벙어리로 만들었다.

기껏해야 쓰는 말은 Hi, Good, Sorry, Thank you, Bye가 다 였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한번 실수하면 바로 탈락이다. 

더군다나 카페에는 이미 충분한 인원의 스태프들이 있었으니까 

숙련되고 의사소통이 잘되는 그들을 시키는 것이, 뭐든 엉성하고 실수투성이인 데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를 시키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고 안심이 될 테니까.


차라리 빨리 잘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주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곧 그날이 오겠지 예감했다.

시한부 인생...

그런데 자꾸 시간만 줄어들고 , 힌트만 주면서 사장은 내게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 주에 내가 일한 시간은 통틀어 2시간이 다였다. 이 정도면 말 다 한셈이지.

마지막 주급을 받고 퇴근하는 길에 토니가 다음 주 근무표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번엔 한 시간 넣어줄 거니...?)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하고 쿨하게 떠났다.  

무겁게 내 발목을 묶고 있던 족쇄가 드디어 풀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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