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마차 Mar 23. 2021

캐나다 회사 생존기#16

최후통첩을받다.

몬트리올의 여름은 천국 같다. 혹독하고 기나긴 겨울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여름만 다가오면 겨울의 악몽을 잊게 하고 다시금 몬트리올을 사랑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습하지 않기 때문에 햇볕이 뜨겁더라도 그늘로 찾아 들어가면 금세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여름이 짧기 때문에 더욱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름이었지만 , B회사에서의 나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나는 의욕이 전혀 없었고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저 아까울 따름이었다.   쥴리앙은 그의 상사인 안토니오에게 인사도 없이 회사를 나갔다. 그가 회사를 떠나던 마지막 날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지연되었고 우리는 할 일 없이 멍하니 모니터에 앉아 일 하는 척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날도 자리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지겨워진 나머지 밖으로 나와 뜨거운 햇볕을 피해  회사 건물 근처 그늘을 찾아 쭈그려 앉았다. 한 껏 데워진 공기와 자동차 소음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니"였다. 그녀는 내 옆에 조용히 쭈그려 앉았다. 파니와 나는 A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파니는 게임 관련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턴으로 A회사에  3D 디자이너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곧바로 B 회사로 이직을 한 파니와 나는 다시 한번 이곳에서 재회를 하게 되었다. A회사에서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 였는데 내가 B 회사로 왔을 때 반갑게 맞아 주어 고마웠다. 자그마한 체구에 수줍은 성격을 가진 파니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지내?]
[그냥 숨만 쉬면서 살아.]
[나쁘지 않네.]
우리는 둘 다 씩 웃어 보이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안토니오가 나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을 싫어해.]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게 재미가 없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보여.]
[그렇게 생각해?]
[응. A 회사에서 너를 봤을 때 넌 행복해 보였거든. 웃기도 많이 웃고.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

내가 안토니오와 올리비에를 싫어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싫어했다. 의욕 없어 보이고 열정 없는 눈엣가시 개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을 할 때 나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자존감도 바닥을 쳤고 일을 하기도 싫었다.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고 일을 하려 해도 어차피 안토니오 말 한마디에 쓰레기가 되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하던 일이 넘어갈 것이었기 때문에 내 작업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나는 이제 안토니오가 뭘 원하는지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뛰쳐나갈 새 직장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답답한 날 들이 이어졌다. 이전부터 앓고 있던 우울증이 더욱 악화되어 약 복용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상황은 나빠져갔다.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는 있었지만 두려웠다. 분명 순조롭게 진행될 리 만무했고 최악의 경우 이 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오는 남편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회의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데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이전 에피소드에서도 밝혔듯이 오랫동안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공기의 흐름만 봐도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대충 감이 왔고, 대부분 나와 남편과 같이 큰 직책이 없는 일개 개발자들이 상사에게 개인적으로 불려 들어갈 때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확률이 매우 높다. 남편이 들어갔다 나오면 바로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겠다고 벼르며 초조하게 나오길 기다렸다. 그가 면담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는 내 어깨를 살짝 치며, 안토니오가 있는 회의실로 가보라고 했다. 이럴 수가….. 정말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싶었다. 설마 둘 다 한방에 자르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회의실로 가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안토니오와 처음 보는 사람이 그의 옆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마주 앉은 안토니오는 내게 서류를 쓱 내밀며 말했다.
[서류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으로 작업자로서 걸맞은 업무 태도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회사 차원에서 언제든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번에 인사팀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고, 당신과 이런 내용의 회의를 주고받았다는 걸 증명할 사람이에요. 읽어 보고 사인해 줬으면 해요.]
뒷 통수를 세게 가격 당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내민 서류를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긴 말로 풀어놨지만 너는 이 회사에 또 이 프로젝트에 전혀 열정도 없어 보이고, 디렉터가 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 팀원들과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하지 않으면 너를 해고하겠다 라는 최후통첩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서류를 들고 있는 손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잘릴 때 잘리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화가 나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기를 쓰고 참았다. 

 



작가의 이전글 캐나다 회사 생존기#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