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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May 03. 2021

부모님처럼살기 싫어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

어린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는 온 세상에 전부이다. 아빠 엄마는 내가 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 내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아빠의 지갑 속에서는 매일 우리가 좋아하는 과자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뚝딱뚝딱 나왔고 엄마는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들을 맛깔나게 척척 해 냈다. 그뿐이겠는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엔 아빠가 몰던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후에 중고 자동차를 마련하기 전까지 오토바이를 이동 수단으로 사용했었다. 4 식구가 쪼르륵 오토바이 좌석에 끼여 앉아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아빠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나중에 커서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엄마 같은 여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나와 동생이 어렸을 적 엄마는 화가 나면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아빠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엄마가 언제부터 욕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으므로 사실상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방을 치우지 않는다.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다. 돈을 아끼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너무 많이 흘린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다. 등등 하나부터 열 까지 엄마는 나와 동생과 아빠의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 듯 화를 냈다. 누구 하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오로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싫었고 무서웠고 피하고만 싶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자주 다투었는데 내가 10대에 들어 설 즈음에는 더욱 자주 더 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지 않는 날은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냉전 상태가 며칠씩 지속되었다.  학교에서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나도 싫었다. 집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탁하고 긴장된 공기의 흐름에 숨이 막혔다. 집에 도착해 곧장 내 방으로 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로 말이 없어졌다. 


같이 살고 있었지만 서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부모님은 그들의 결혼생활 내내 평행선을 달렸다. 싸우고 미워하고 헐뜯고 서로를 무시했다. 몇 년을 이어진 싸움에 부모님의 이혼을 간절히 바랬다. 처음부터 부모님의 이혼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었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상황은 나빠져만 갔고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내가 고등학교 3 학년 때의 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야간 자습을 밤 10시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안은 완벽하게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양 방바닥은 온갖 깨지고 부서진 물건들로 가득 차 발을 디딜 틈 조차 없었다. 살림살이 들은 뭐 하나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교복도 벗지 않은 채 나는 말없이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한가득 나왔다. 쓸고 걸레질하고 깨끗하고 말끔하게 최선을 다해 부모님의 부부싸움 증거물을 치웠다. 설거지 통에 있는 그릇들도 치우고 난 후 여느 때처럼 샤워를 하고 내가 치운 거실 한복판에 작은 책상을 펴고 녹화 해 둔 교육 방송을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아무 동요 없이 내 할 일을 하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의 사이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무슨 일인지 대화로 풀자고 두 분의 손을 잡고 호소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 나는 이 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을 할 나이가 되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시기를 하루라도 앞당겨 망가진 이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부모님에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부모님과 같이 인생을, 서로를 미워하고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한탄만 하며 인생을 허비하지도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바람이 너무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 너무 간절하다 보면 불안과 초조함 역시 같이 온다.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최고가 되지 못하는 내가 늘 못마땅했다. 인정받아야 하고 성공해야 하는데 내 능력은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다른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자꾸만 불안하고 좌절하게 되었다. 시험에서 예상보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친구들 앞에서 울어버리거나 얼굴엔 ‘ 나 시험 못 봤소’ 라며 대 놓고 티를 내고 다녔다. 친구들은 그만하면 됐으니 잊어버려라, 다음 시험에서 잘 보면 된다 라고 위로를 했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나를 멍청한 아이로 보면 어쩌지?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이것보다는 잘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늘 남의 눈치를 봤다. 내가 행복하고 좋아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건 다 소용없이 오로지 남이 봤을 때 부러워할 만큼이 돼야 충분한 것이라고 느꼈다. 이러다 성공하지 못하고 부모님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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