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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May 21. 2021

부모님도 그저 사람이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철이 없는 부모님 덕에 나는 지나치게 빨리 어른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 살던 곳을 떠나 서울로 직장을 잡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집요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류상으로 완벽하게 이혼 처리가 되었고 아빠와 엄마는 완전히 남이 되었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갔다. 자식들 때문에라도 그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온 시간들이 김장 무 자르듯이 댕강 잘려 나가며 나눠지는 관계가 아니겠지만, 둘의 관계는 지루하게 얽혀 있었다. 문제는 끊어지지 않는 둘 사이의 감정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엄마는 아빠가 같은 세상에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조차 저주를 할 정도로 미워했지만 아빠는 한 번 결혼한 사이 이므로 그 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양립할 수 없는 둘 사이의 감정 폭풍우 속에 내가 있었다. 


직업이 없고 아빠로부터 이혼할 때 위자료를 두둑이 받은 것도 아닌 엄마는 전적으로 생활비의 대부분을 아빠로부터 받고 있었다. 아빠는 별 다른 말 없이 월급의 대부분을 엄마의 생활비로 내주었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부모님의 빚도 함께 갚아 나가고 있었다. 당시 아빠의 월급은 대부분 빚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빠의 경제 사정은 정말 엉망이었다. 어떻게든 월급 차압만은 막고 싶었던 아빠는 카드를 돌려 가며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돈은 제때 엄마에게 지급되지 않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 돈이 통장에 들어올 때까지 아빠에 대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엄마에게 융단 폭격을 맞고 나면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해 독촉을 해야 했고 잔소리에 지친 아빠는 종종 나에게 그 돈을 먼저 엄마에게 내 선에서 지급할 것을 부탁했다.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부모님의 빚을 갚아 주고 용돈도 드리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살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내 주머니 사정은 간신히 숨만 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싶어 단 한 번도 돈이 부족하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팍팍한 인생에 내 문제까지 보태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오히려 내가 얼마나 돈을 잘 벌고 문제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지 허세를 부리기까지 했다. 연기를 꽤나 그럴싸하게 했던 탓인지 부모님은 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으셨고 점점 이것저것 요구 하기 시작했다. 지쳐서 헐떡 거려도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운 딸로 여긴다는 사실에 그저 뿌듯했다. 


서울에서 일을 하며 나와 동생(당시 대학을 다니느라 서울에 있던)은 한 달에 2번 정도는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려 노력했다. 아빠는 그 날을 핑계 삼아 엄마와 함께 만나기를 원했지만 엄마는 완강히 거절했다. 이번 만남에 엄마도 나오냐는 아빠의 기대 섞인 바람에 매번 그러지 못한다고 대답하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실망감 때문이었을까 아빠는 우리와의 만남을 탐탁지 않아했다. 아빠의 시큰둥한 반응에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나와 동생은 자식이다. 아무리 부부의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한테 그럴 수는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속이 상하고 실망스러워 미처 속으로 감추지 못하고 나오는 태도라고 고집스럽게 나를 위로했다. 


아빠의 생신 날, 나와 동생은 선물과 케이크 하나를 사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미리 약속을 하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아빠는 굳이 본인이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엄마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약속을 잡길 원했다.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아빠 생일이니 같이 식사나 하자고 제안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예약한 식당 근처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듯했다. 태우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뗀 아빠가 엄마는 오지 않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아빠는 갑자기 저녁을 취소하자고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순간 말 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케이크와 선물 준비했으니 저녁만 빨리 먹고 헤어지자고 말했다. 아빠는 다시 거절했다. 나는 다시 침착하게 아빠를 설득했다. 

" 우리가 아빠 때문에 저녁 먹자고 미리 식당 예약해 놓고 선물하고 다 가지고 왔는데 지금 취소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엄마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속상한 건 알겠는데 우리 성의를 봐서라도 저녁이라도 먹고 가. 지금 안 먹으면 혼자 먹을 거잖아."

아빠는 마지못해 움직였다. 나는 동생과 아빠를 먼저 식당으로 올려 보내고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케이크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순간 들고 있던 케이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힘껏 밟아 박살을 내고 싶었다. 날씨 좋은 초여름 보도블록 위로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 냈다. 옷소매로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되는 대로 닦고 서둘러 식당에 올라가 저녁을 먹고 우리는 재빨리 헤어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우연히 엄마에게 하게 되었다. 당시 받았던 상처가 쓰리고 아파 건드리고 싶지 않기도 했고, 가뜩이나 아빠를 싫어하는 엄마에게 이 이야기는 그녀의 분노를 부추기는 좋은 먹잇감이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엄마는 그저 콧방귀를 한번 뀌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정한 위로를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반응에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엄마는 자식들의 감정에 대해 예전부터 쭉 관심이 없었다. 그동안 몰랐지만 10년이 훨씬 지난 후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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