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보호자분이 누구시죠?"
돌봄이 시작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아빠 때도,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도 항상 첫 질문으로 들었다.
병원에서 할머니의 상태를 설명할 때,
보호자 서류에 작성을 할 때 그 자리에 엄마는 꼭 있었다.
그리고 '보호자'란에 엄마의 서명이 들어갔다.
그렇게 엄마는 할머니의 주 보호자가 되었다.
외할머니이니까
엄마의 엄마니까
할머니를 집으로 모실 때에도 당연히 엄마가 주보호자였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엄마의 옆에서 하나씩 도와주다 보니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드실 수 있는 음식, 대소변의 타이밍,
몸이 좋지 않을 때의 변화 등 자그마한 변화부터 미세한 신호까지
오히려 엄마보다 더 많은 부분을 느끼고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이면서
어느새 내가 할머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 오늘은 팔, 다리 찜질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엄마, 할매 식사가 이젠 우리 밥처럼 드려도 될 것 같아"
"딸, 할머니 밥 양은 이 정도면 될까?, 옷은 이게 어때?"
엄마에게 내가 제시를 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가 내게 물어보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내가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마다 육아의 방식이 다르듯
엄마와 나는 돌봄의 방식이 달랐다.
엄마는 할머니의 편안함을 우선시했지만
나는 할머니의 회복이 최우선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엄마의 방식이 답답했다.
어떻게든 재활은 매일 해야만 했고,
조금만 아파 보여도 병원으로 바로 가야만 직성이 풀렸다.
점점 예민해진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고,
엄마는 조용히 나의 말을 듣고 따라주기만 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더 잘 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고,
그 확신이 엄마를 무시하는 말로 나왔다.
돌이켜보면, 엄마도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엄마도 9년간 아빠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엄마 나름의 방식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최근 들어 나는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쓰기로 했다.
2년 동안 미뤄왔던 나의 계획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다.
공부에 집중하니 신기하게도 예민함이 조금 줄었다.
글을 쓰면서 자그마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나'를 위한 시간이 생기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혼자 할머니와 아빠를 보는 시간이 늘었다.
홈 CCTV 속에는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가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답답하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밀려왔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엄마한테 떠넘긴 게 아닐까?!"
'할머니의 상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을까?'
가장 무서운 건
엄마가 혼자 있을 때 할머니가 갑자기 아픈 거였다.
분명 엄마의 경험으로 충분히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급박한 순간의 판단은
내가 더 빠르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없을 때, 엄마 혼자서 그 순간을 마주하는 게
그리고...
'엄마까지 아프면 어떡하지?..'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것이 많아지고,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가장 두려워지는 건 엄마였다.
삼촌과 동생과 내가 도와도 중심은 엄마였다.
결국 아빠도, 할머니도 엄마의 몫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는
피로와 스트레스로 몸이 부으며 살이 찌고,
허리통증을 느끼는 날이 많아지고,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두려워졌다...
엄마가 쓰러질까 봐...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빠, 할머니, 그리고 엄마까지...
그럼 정말 답이 없었다.
돌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돌봄의 무게'는
서로의 어깨에 저울질하듯 했다.
나는 실제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주 보호자였다.
'주 보호자'라는 말은 무겁다.
법적인 제재가 묶여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일생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무거운 무게는 엄마가 지고 있다.
그저 엄마의 곁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삼촌과 동생도 각자의 방식으로 도와주며,
그 무게를 완전히 덜어 줄 수는 없지만
조금씩 나눠질 뿐이다.
그게 가장 미안하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도 돌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무게를 더하기도 하고,
'이기심'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무게를 덜어주기도 하며
닿을 듯 닿지 않는 어딘가 놓인 서로의 무게를 나눠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