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Aug 20. 2024

변하는 것들

더위가 모든 것을 잊게 해 줘서 고맙다. 쓸데없는 상념보다는 온몸에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를 피하는 것이 먼저니까. 말복이 지나면 조금 누그러진다고 했는데 매일매일이 폭염 경보니 이제 계절의 주기에 기댔던 과거의 지혜도 서서히 저물어가는 모양이다. 하긴 한국의 기후가 점차 아열대로 변해간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기후의 변화보다 더 눈과 마음을 배신하는 것은 오랜만에 찾게 되는 기억 속의 장소이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내가 시내에만 나가면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꼽아보면 종로를 본 지 십 수년, 명동에 가본 지 이십 년 하는 식이니 새삼 거리가 변한 것을 탓할 이유도 없다. 한 때는 그리도 발이 닳도록 헤매던 그곳이 왜 내게서 그토록 멀어졌을까? 이제는 친구들과의 약속도 주로 강남이다. 강남역, 교대역, 신사역, 청담역... 가만히 보니 역을 중심으로 만나는 것이 일상이다. 마땅히 차 세울 곳도 찾기 힘드니 전철역 주변으로만 몰려드는 것이겠지. 마치 밝은 불가로 모여드는 날벌레(?) 같다. 이런! 표현에 신경 좀 써야겠네. 날벌레라니. 글이야 지우면 그만이지만 마음속의 이미지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렇듯 변한 거리가 건물이 사람들이 왠지 가슴 아픈 것은, 아련한 것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느림’(Lenteur)이라는 제목의 소설 속 ‘나’는 이렇게 탄식한다.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속도에 모든 것을 위임하고 난 뒤 세상은 변했다. 나는 요즘 산속에서 잠들었다가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 립 반 윙클(Rip Van Winkle)이 된 기분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모든 것, 나 자신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는 인식의 암흑 속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다.


며칠 전 대학 선배와 친구를 만났다. 여지없이 강남 양재역에서. 두 사람 모두 세월 속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과 함께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있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선배의 아내 분은 얼마 전 뇌수술을 했다. 종양을 제거하면서 주변부도 함께 절개했는데 그런 이유로 선배의 말을 빌자면 “결혼 생활 40년 가운데 30년의 기억이 사라졌어.”란다. 어찌 그런 일이! 하긴 치매라는 현대의 질병도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를 들고 다니는 것이겠지. 나이가 드니까 즐거운 얘기는 별로 없었다. 병과 죽음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웃으며 얘기하지만 참 썰렁하다. 애써 화제를 돌려도 금세 얘기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하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책상 위에 약병이 쌓이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친구의 얘기에는 가슴이 먹먹하다. 우울증에 빠진 60 초반의 동생과 함께 사시는 90 노모의 이야기. 삶은 참 결론이 정해진 소설 같다. 뒤에서 무언가 목을 누르는 것 같다는 친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은 결국 그려진 인생의 초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바보와도 같다. 꽃은 시들고, 바람은 지나가고, 구름은 비 되어 내린다. 변하는 것은 어차피 정해진 이치... 하지만 긴 무더위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우울하고 끈적한 삶의 블루스. 김수희의 ‘남포동 블루스’를 부르던 그날의 그는 어디로 갔는가? 카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그 사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겠지. 얼마 후면 가을의 쓸쓸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추위 속에 흰 눈을 기다리겠지. 거리는 얼어붙고, 지나는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에 목을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겠지. ‘인생에는 어떤 마술이 있어. 그것은 변화 속에 드러나는 것이야.’ 맞다. 변화는 참으로 마술과도 같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순간적으로 바꾸어 놓으니까. 리고 기억은 그저 낡은 필름처럼 희미하게 돌아갈 뿐이니까. 그런데 그 불투명한 기억은 왜 그리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건지!         


작가의 이전글 두 얼굴의 월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