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 평화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에밀리 디킨슨
여러 번 평화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평화는 저 멀리에 있었죠.
난파된 배에 탄 사람은 육지를 보았다고 생각해요.
바다 한 복판에서.
게으름뱅이도 애는 쓰지만 결국 증명하죠.
나만큼이나 희망이 없다는 것을.
허구의 해변은 몇 개나 될까요.
항구에 이르기까지.
희망과 현실은 늘 다르다. 가끔 헛된 희망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의미 없는 꿈일 뿐이다. 긴 더위 끝에 내리는 한 줄기 소나기는 잠시의 시원함을 주지만, 비가 그치면 온몸이 물기에 젖는다. 높아진 습도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비가 주는 짧은 선선함에 가을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푸른 하늘과 낙엽 떨어지는 가을은 여전히 몇 차례의 무더위를 참아내야 맞을 수 있는 데도 말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육지를 보는 것은 환상이다. 환상으로 사는 사람은 환멸로 죽는다 했던가? 그 환상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말자. 꿈과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되뇌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현실은 지옥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착각이기 쉽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한 미국 잡지의 여론조사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었다. “당신은 회사에서 상위 10 퍼센트 안에 드는가?”라는 질문에 직원 90 퍼센트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간부급들은 무려 97퍼센트가 ‘예스!’ 이 무슨 상황인가! 산수로 계산해도 90 퍼센트가 어떻게 10퍼센트 안에 들어간단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우리는 종종 자신은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들은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한다.---아, 물론 나 같은 사람은 매 순간 나는 게으르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왜 그럴까? 어쩌다 그런 웃기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도’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은 ‘행동’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긴 머리로는 늘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그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착각을 한다. 나 빼고는 모두 게으름뱅이라고!!
사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게으름의 질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노력’은 달리 정의된다. 그것은 “단지 옳은 시간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게으름뱅이도 노력은 한다. 그저 옳은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노력은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하는 것이다. 추구하고 굳게 마음먹는 일이다. 우리는 가끔 난파선의 선원처럼 육지를 본다. 해변에 닿기도 전에 무수한 항구를 본다. 그저 꿈이다. 하지만 그 꿈은 허망한 것만은 아니리라. 언젠가 옳은 시간에 옳은 것을 찾아낸다면 그 꿈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