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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근화 Oct 09. 2020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웹툰 평론 - 이현민 작가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2019년 한국 극장가에 큰 반향을 일으킨 두 편의 코미디 영화가 있다. 하나는 천만 관객을 넘긴 ‘극한직업’이고 다른 하나는 940만 관객을 모으며 준 천만의 타이틀을 가져간 ‘엑시트’이다. 두 영화가 흥한 이유, 그리고 평론가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신파를 통한 억지 감동을 철저히 배제하고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심 플롯의 전개와 그 플롯을 보조하는 코미디에 모든 역량을 투자한 덕분이었다. 마약 사범을 잡으려는 형사들의 이야기,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려는 두 젊은이의 이야기는 적절한 스릴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것을 전개할 때는 시종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관객을 반드시 웃기겠다는, 코미디 영화의 소명에 완벽히 충실한 덕분에 두 작품은 성공할 수 있었다. 두 작품을 보면서 창작자가 억지 메시지를 담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본업에 극한으로 충실할 때 예술이 완성된다는 영화 평론가 라이너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기쁘게도 그런 콘텐츠가 만화계에도 존재했다. 완결된 이후 뒤늦게 존재를 알게 된 극한의 코믹 웹툰, 이현민 작가의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이다.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은 모두 취준생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삼성전자에서 모티브를 딴 듯한) 풍운전자라는 대기업에 채용되기 위한 시험에 지원하고 면접 전형을 진행하기 위해 합숙소에 모이는 부분부터 만화는 시작한다.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기 위해 선택한 소재이겠지만, 돌이켜 보면 이 소재 선정부터가 참으로 현명했다. 지원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면접장을 나가야 하는 서바이벌 구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면서 주인공의 생존을 바라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되려 비일상적인 플롯이 남발되는 다른 만화들과 달리 20대 청년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소재로 삼았기에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기는 더욱 쉬웠을 것이다.


 뼈대를 잡기 쉬운 소재였고, 이야기 속에서 뛰어놀 사랑스러운 주인공을 만들어내어 만화를 시작할 준비를 모두 마친 작가는 그 뼈대 위에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 장기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의 개그감이다. 개인적으로 만화를 보면서 끅끅 소리를 내며 웃은 적은 이 작품과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질풍 기획을 봤을 때뿐인데 그만큼 사람을 웃기는 데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작가라고 보장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한국인의 유머 코드에 최적화된 만화를 그릴 줄 아는 사람인데, 극 초반에 해당하는 2화에서부터 나온 한 장면을 소개하자면 풍운전자는 합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뜬금없이 1차 면접을 시작한다.


 일명 ‘예쁘게 입어요’라는 면접 전형. 면접관이 불량한 복장을 한 면접생들을 버스에서 바로 쫓아내는 것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평범한 장면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의자에서 발사되며 옷에서 웬 날개가 튀어나오고, 그 충격적인 장면을 모두 목격한 면접관은 가이드 라인에 없는 날개 달린 옷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고민한다. 상사에게 전활 걸어 날개 달린 옷을 묘사하다가 술 마셨냐는 핀잔을 듣는 면접관의 모습도 깨알 같은 웃음 포인트다.


 이렇게 극 초반부터 쉴새 없이 사람을 웃기는 만화이지만 단순히 웃기기만 하고 끝났다면 구태여 평론까지 쓸 만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극한직업과 엑시트의 예를 들며 감동을 철저히 배제하고 코미디에만 집중하여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 배제되는 감동이란 신파를 통한 감동을 말한다. 그 말은 극의 흐름에 맞게 자연스러운 감동을 끌어낼 수 있다면 코미디에 감동이 섞인다 해도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는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동을 우려내는 데 성공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풍운전자에 원서를 넣은 면접생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김건호이다. 김건호는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저스펙 취준생들의 특징을 한데 모아 완성한 듯 이름 없는 대학을 다니며 그 흔한 토익 점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원자다. 그만큼 자존감도 바닥을 치고 있던 그는 풍운전자에 합격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운 좋게 서류 전형을 통과한 뒤 면접장에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또래의 경쟁자들을 보며 점차 자신을 바꿔나간다.


 물론 우리는 하위권 대학교의 학점 낮은 저스펙 지원자가 서류 전형을 통과하는 것부터가 판타지임을 알고 있지만, 그 정도는 허락해도 괜찮지 않은가? 그 어떤 판타지도 허용하지 않고 암울한 현실만을 보여 준다면 그 컨텐츠의 종류는 만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감 없이 남 눈치만 보던 건호가 순발력을 발휘해서 그룹 면접을 승리로 이끌고, 노력하는 경쟁자들을 보며 집안 환경 탓만 하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개그를 넣을 때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 장면을 남발하며 아무 제한 없이 사람을 웃기던 작가도 건호의 성장이 다뤄지는 부분에서만큼은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렇게 만화이기에 충분히 용인 가능한 정도의 판타지에 힘입어, 작가는 김건호라는 인물을 성장시키고 독자들이 그에게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주었다.

 그런데 작가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선택은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역할을 김건호 한 명에게만 몰아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영리함과 함께 배려심을 느낄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주 독자층이 20대 대학생이나 취준생일 것이라는 계산이 충분히 섰을 터인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볼 독자들이 결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는 획일적인 사람들이리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건호처럼 저스펙의 댝점을 극복하고 대기업 취업을 이뤄내려 하는 취준생도 있을 테고, 반대로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세우며 노력의 결과를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작중 박재천). 또 같은 스펙을 가지고도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당해 본 독자도 있을 수 있고(작중 정향실) 우수한 능력을 갖췄으나 자신이 가는 길에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작중 최필재). 이런 다양한 사정과 관점을 가지고 있을 독자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전개가 가능할지 의문이 들겠지만, 이 작품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만다.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독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고 결국 그들 모두가 나름의 승리를 거두는 결말을 보며 훈훈함을 간직한 채 마지막 스크롤을 내릴 수 있다. 특히, 요리사의 꿈이 있었으나 가족의 기대에 어쩔 수 없이 대기업 면접에 임한 최필재가 결국 자신의 길을 깨닫고 멋지게 지원번호가 적힌 명패를 떼어 내는 장면은 만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기업의 문은 좁고, 그렇기에 모두가 좁은 문으로 가는 그 좁은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확신을 주지 못하는 길을 단순히 남들이 다 간다는 이유로 동참해 버거운 경쟁의 틈바구니를 감내할 필요는 없다고 작가는 최필재를 통해 얘기하고 있다.


 독자가 만화를 찾는 궁극적인 이유가 팍팍한 현실에서 잠시 틈을 내어 자신에게 위로를 주고자 함이라면 이 만화는 그 목표에 훌륭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추천할 만하다. 위로의 수단은 기분 좋은 웃음이 될 수도 있고 긴장감 끝에 맛보는 승리감이 될 수도 있으며 직접적인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 이 만화는 코미디와 드라마 사이에서 노련하게 기어를 바꿔가며 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메시지는 진지하지만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그 전달 방식은 전혀 거북스럽지 않은 콘텐츠. 코미디를 지향한다고 해서 마냥 우습게 볼 만화는 아닌 이유다.


 마지막으로, 제목 선정에 있어 작가가 들였을 정성을 한 번 언급하며 평론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면접이란 결국 기업에 자신을 파는 일이라고 언급하는 작중 인물의 대사가 있다. 무언가를 팔고자 한다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해가 끝났다면 분명하고 자신감 있는 어조로 그 대상의 ‘매력’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말’을 할 기회조차도 잡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많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우리가 그것을 놓치지 않기를 작가는 바란 것 같다. 면접장의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잠시 눈을 감고 이 만화의 제목을 떠올려 보며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까. 면접관들이여, 지금부터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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