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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근화 Jul 16. 2020

반쪽짜리 봉사자

성인이 되고부터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거치며 사회 경험을 쌓아왔다. 가짓수로 대략 10가지가 넘어가는 다종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며 내린 결론은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르바이트는 결국 과외라는 것이었다. 근무 강도는 낮은데 수입은 만족스럽고 선생님 대우받으면서 자존감도 채울 수 있는 일. 별다른 변동성이 없는 일의 특성상 연차가 쌓일수록 내 실력은 좋아지고 그만큼 고객의 만족도도 올라간다. 매달 첫째 주 토요일마다 꼬박꼬박 입금되는 수업료를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자신의 철없는 과거에 문득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는 바랄 수도 없었던 입금액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평균 이상의 공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흙수저는 결국 있는 집 자식들의 계급 대물림에 기여하는 비루한 하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무리 대학생 시절 지나가는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이라지만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공부한 것인가. 현재의 돈벌이를 위해서는 과거에 품은 이상은 스리슬쩍 꺾어 버려도 그만인 것인가.


 내적 모순에 직면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대개 둘 중 하나다. 과거의 철이 없던 자신을 반성하며 이게 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며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신의 모순됨을 인정하되 과거의 소신을 버리지는 않는 소극적인 저항을 이어나가든가. 둘 다 그리 시원하지는 않은 선택이지만 과거의 소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선택지는 나에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갈림길에 선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비록 있는 집 자식들에게 개인 수업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나는 결코 사교육 시스템을 긍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증거로, 과외를 할 형편이 안 되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해 무료 교육 봉사를 해주고 있지 않으냐. 오히려 있는 집 자식들에겐 비싼 수업료를 받으며 가르치는 내용을 저소득층에게는 무료로 가르치고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부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아닌가. 마냥 시원치는 않더라도 이런 식의 합리화를 거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에게 교육 봉사란 그런 의미였다, 참된 이타심의 발로라기보단, 계급의 고착화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신에게 부여하는 최소한의 면죄부.


 그런 나였기에 무료 수업을 듣던 제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면, 되려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한 학생에게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나는 반쪽짜리 봉사가로서 느끼던 부끄러움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았던 한 여학생. 집안의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서 생활한다던 딱한 사정을 듣고서 나는 그녀의 생활에 즉각 도움을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은아, 너 외부장학금 한 번 신청해볼래?’ 흙수저와 금수저가 벌이는 경쟁의 불공정함은 단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재력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다. 재력의 불균형은 곧 정보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기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으면 잡을 수있는 무수한 기회들이 흙수저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 버린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그러한 기회들이 나에게도 있었음을 깨달았던 나는 가은이가 자신의 기회를 꼭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어려운 형편에서도 본인이 공부의 의지를 꺾지 않고 계속 노력해 온 덕에, 성적으로는 장학금 혜택 기준을 넉넉히 만족할 듯 보였다. 나에게서 외부장학금의 존재를 처음 전해 듣고 함께 지원서를 작성하며 가은이의 눈에 떠올랐던 초롱초롱한 희망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며칠 뒤에 소정의 장학금을 받고 기쁨을 나누며 더 열심히 공부해보자고 의지를 다지는 학생과 선생의 모습을 눈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우리가 공유한 감정은 기쁨과 희망이 아닌 절망과 배신감이었다. 수업 시간이 한참 지나 사회 복지 센터에 모습을 드러낸 가은이는, 어쩐지 평소보다도 훨씬 더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눈을 내리깔고 있던 가은이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담임선생님이 추천서 안 써주셨어요. 자기가 이런 거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선정되기 어렵다고…….”

 그럴 테지. 아직 서류 심사 결과가 발표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서류 통과에 대한 기대감에 부푸는 게 자연스러운 시기에 벌써 저렇게 풀이 죽었다는 건 애초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가은이에게 담임선생님의 나이를 물었다. 오십 대 중반이요. 그 대답을 듣고 나서 귀찮은 일을 맡기 싫어 서류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는 무책임한 교사의 얼굴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연금은 이미 보장되어 있고 이제는 정년까지 편하게 공직 생활할 생각만 하는 게으른 50대 교사. 문득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내 담임이 생각났고 교무실에서 핸드폰을 보며 상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져 물을까. 하지만 보호자도 아닌 내가 주제넘게? 그리고 따져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겠지. 바쁘시겠지. 학기 초라 그렇다고 하겠지. 비록 추천서에 이 학생을 추천하는 이유 서너 줄 쓴 다음 서명 하나만 갈겨주면 끝날 일이지만 그 정도 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바쁘실 테지. 곱씹어 볼수록 더 화가 날 노릇이었다. 아무리 학기 초라해도 학생들의 가정형편 정도는 파악이 다 끝났을 시간이다.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 정도면 학교 측에서도 최우선 관리 대상으로 놓아야 당연한 노릇 아닌가? 그런 학생에게 추천서를 써줄 잠깐의 시간도 낼 수가 없단 말인가. 담임이라는 사람이. 본인이 이런 경험이 많아서 될 확률이 낮다는 말은 적어도 지원을 시켜 주고서야 할 수 있는 말이다. 확률이 낮다고 시도조차 하지 말자는 것이 정녕 담임이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바람만 잔뜩 넣어주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가장 나쁜 놈이 된 것 같았다. 주체 못 할 자책감이 몸을 감쌌고, 그런 와중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가은이가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네가 안 우는데 내가 울어서는 안 되지.’

 나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바깥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받아왔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가은이에게 쥐여준 나는 짐짓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뭐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고등학생 때 장학금 못 받으면, 그냥 대학 가서 받으면 되잖아? 너 그거 아냐? 수능만 잘 쳐도 받을 수 있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거?”

 가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학책을 꺼냈다. 한 권의 책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모서리가 낡은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펼친 페이지의 가장 위에 있는 문제를 풀라고 시킨 후, 문제에 집중하는 가은이를 보며 나는 다짐했다.


 ‘내가 너는 반드시 성공시키겠다. 비록 지금은 네가 간호대를 꿈꾸고 있다 해도 수능을 칠 무렵엔 의대를 노릴만한 성적을 반드시 만들어주겠다. 나보다도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게. 너는 그럴 자격이 있고, 너는 그래야 하는 아이니까.’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동질감 그리고 담임에게 보란 듯이 결과를 내놓고 싶은 오기. 두 감정이 합쳐져 맺은 결연한 다짐 덕분에, 그날의 수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밀도로 진행되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가은이는 언제나처럼 센터에 남아 복습을 하기로 했고 나는 먼저 짐을 챙겨 일어나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쌤, 고맙습니다.”


 평범한 의미였을지도 모를 그녀의 인사에 눈물샘이 뒤늦게 자극을 받았다. 아무것도 못 해준 사람한테 고맙긴 뭐가 고맙다고. 나는 다음 주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교실을 떠났다. 센터 담당자님과도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청승맞게 길에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은이의 마지막 인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쩌면 나는 이 일을, 무료 교육 봉사라는 일의 무게를 깎아내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교육을 욕했으면서도 결국 사교육으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나의 현실을 합리화할 수단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과정은 어찌 됐건 나는 이제 한 고3 학생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고, 그런 만큼 더 큰 책임감을 느끼며 센터에 와야 하지 않을까. 반쪽짜리 봉사를 한다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신에.


 과외와 봉사를 비교하자면 과외가 더 기분이 좋아야 마땅하다. 학생과 마주 앉아 수학 문제를 풀 뿐인데 그 시간이 6만 원의 수입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가은이에게 인사를 받고 귀가한 그 날 이후로, 나는 센터에서의 봉사 시간이 더 기다려졌다. 내게 들어오는 돈은 조금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이 봉사에는 존재했다.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교육자로서의 의무감보다도 그저 누군가의 꿈을 이루는 데 내가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성취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가은이의 도전은, 그리고 가은이와 함께 하는 나의 도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비록 일타강사는 아니기에 나와의 수업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장은 못 하지만 주당 두 번씩 진행되는 센터에서의 수업을 위해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 의대는 못 갈지도 모른다. 게으른 담임에게 한 방 먹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도 학생도 지금 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최선은 다하고 있기에, 당장의 장학금은 없더라도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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