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근화 Jul 17. 2020

그렇게 우리는 영웅이 된다.

김혜진 작가의 [9번의 일]을 읽고

  이야기의 역사가 깊어짐에 따라 영웅의 서사도 시대에 맞춰 발전해 왔다. 무조건 착하고 강하고 최후에는 반드시 승자가 되는 평면적인 영웅상에서 고뇌하고 흠결이 있으며 그러다 끝내 패배의 결말을 맞기도 하는 다채로운 영웅상으로.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영웅’이라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빌런’이라 불리는 대립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웅과 빌런의 관계를 고려하면 작품에서 다뤄지는 영웅의 모습이 계속 바뀌어 왔다는 말은, 곧 빌런 역시도 그에 못잖은 변화를 겪어 왔다는 뜻이 된다. 이유 없이 악랄하기만 한 춘향전의 변사또에서 어머니에게 학대당하고 사회에 버림받은 끝에 조커가 되어 버린 아서 플렉까지. 영웅과 악당의 서사에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그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작품 내의 도덕적 잣대에 먼저 변화가 생겨야 한다. 그리고 나는 김혜진 작가의 [9번의 일]에서 그와 같이 가치 판단의 잣대가 격렬하게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렇게 서글픈 서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 뜬금없이 웬 영웅과 악당의 서사인가? 작품 내에서의 선과 악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갈리고 있는데 그 판단의 잣대에 대체 어떤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지만, 난 오히려 그 의문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반문하고 싶다. 글쎄, 정말로 이 소설에서 선과 악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을까?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역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대답은 자명해 보인다. 주인공 ‘그’를 끝없이 괴롭히는 회사의 사람들, 부장, 국장, 실장 등등 이름은 모르겠지만 참으로 다양한 직함으로 달고 나와 번갈아 가며 ‘그’를 괴롭혀 대는 악의 무리들. 그런데 그 악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뱉은 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도 위에서 지시 받는 월급쟁이일 뿐입니다. 이런 짓 안 하면 다음엔 내가 잘릴 거라고요. 아시잖아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대사가 마냥 근거 없는 합리화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의 말은 사실에 기반한 부분이 더 많다. 부장 직함이라 봤자 회사에 고용된 직원의 한 사람일 뿐이고 그를 쫓아내라는 상사의 지시를 수행해내지 못하면 거꾸로 본인이 옷을 벗어야 하는 을에 불과하다. 물론 시켜서 하는 일이라 해도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인간적인 예의도 없이 그를 조롱하고 멸시한 부장의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역겹기까지 한 부장의 태도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철저히 이득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부장이라면 상부로부터의 지시가 없었다면 그가 회사에 남든 말든 전혀 신경을 안 썼을 확률이 높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직장인으로서의 뿌리를 가진 부장을 그토록 악랄하게 만든 존재는 그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부장과의 갈등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그가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는 부장에서 국장까지 얼굴과 이름을 계속 바꾸어 왔으나 모두 꼭두각시일 뿐 최초의 의지를 보였을 ‘빌런’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9번의 일]은 ‘악당’의 서사를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다른 형태로 확장 시킨다. 그가 맞서 싸워야 했던 대상은 자본 혹은 시스템이란 이름을 가진 보이지 않는 적이었다. 그것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그’에게 가지고 있던 적의를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분산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았다. 심지어 그 꼭두각시들도 능력이 성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지킬 가정이 있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러니 야박하지만 이해해 달라는 꼭두각시들의 사과 아닌 사과에 진정성이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이 악당의 전파력은 회사 내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 밖에서도, 분신 자살을 해 버린 친구의 시신을 두고 그 값을 매기는 친구의 아내와 노조 대표를 통해 그는 자본의 비인간성을 다시금 목도한다. 


 이런 부분에서 작품 속에서의 선악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져 간다.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자가 적이다, 저자가 악이다!’라고 선언을 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마냥 악당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온 힘을 다해 싸울 수가 없다. 남은 선택지는 오직 버티기 뿐이다. 비정한 자본은 그 와중에도 끝없이 을들을 갈라치며 ‘그’를 괴롭히지만 아들과 아내가 있는 ‘그’는 끝내 그 모든 치욕을 견뎌낸다. 이 부부분에서 소설은 창작물임에도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해 책을 집었건만 책에서마저 그 끔찍한 현실의 복사판을 보게 되었다. 아마 이대로만 끝났다면 [9번의 일]이 변화된 영웅의 서사를 만들어냈다고 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작가는 조금의 진전을 통해 소설을 하나의 영웅 서사로 발전시켰다.


 영웅이란 대체 무엇인가. 전통적으로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거대하고 분명한 업적을 남기는 뛰어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영웅이 어디 나왔다는 말인가. 영웅을 찾을 수 없었다고 느낀다면 [9번의 일]에서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에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강대한 적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배를 납작 깔고 엎드려 자신을 뽑아내려는 자본의 마수를 견디어 내는 을들이 있을 뿐이다. 출발선부터가 브루스 웨인과는 다른 그들에게, 배트맨과 같은 업적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자신들이 딛고 있는 그 땅에서, 각자의 고담시티에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이나마 바꿀 수 있다면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나가지 않기 위해 끝내 그들의 비인간적인 지시에도 복종했지만, 이후에 자신이 세운 송전탑을 망가트림으로써 을을 괴롭히는 을만큼은 되지 않은 ‘그’의 선택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병든 노모가 계시고 곧 대학에 들어갈 아이가 있는 그에게 그 이상의 용기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끝까지 ‘그’라는 3인칭 호칭으로만 남은 이유는 ‘그’의 모습을 독자 자신에게 투영해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깔린 장치일 것이다. 작가는 독자 자신을 투영한 ‘그’의 용기를 보며, 우리도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큼은 이 시스템에게 저항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누군가는 소극적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당신은 충분히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따뜻한 격려가 마지막 페이지를 통해 전해졌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먼저 사회의 맛을 본 선배들은 말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절망감을 느끼던 순간도 있었으나 눈앞의 일을 바쁘게 좇다 보면 그런 절망감도 어느새 옅어진다. 그리고 [9번의 일]을 읽으며 그 절망감이 참으로 쓸데없는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웅에게는 영웅의 할 일이 있고, 소시민에게는 소시민의 할 일이 있다. 애초에 밟고 서 있는 땅의 위치가 다르기에 그들의 활약과 나의 그것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작은 부분에서나마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갑을 쓰러트릴 수는 없더라도 을을 괴롭히는 조금 더 센 을이 되지는 않겠다는 의지. 그 소박한 의지를 관철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반쪽짜리 봉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