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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근화 Jul 18. 2020

석공 #1

오월의 어느날 지은 자작 소설

늦봄의 햇살은 방탄모 위를 따갑게 내리쳤다. 그늘진 담벼락을 찾아 헤매던 창수는 적당한 터를 찾아 벽을 기대어 앉았다. 입대 이후 생긴 습관에 따라, 그는 일기를 쓰기 위해 군용 수첩을 꺼내 들고 펜을 찾아서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몇 번이고 주머니를 두드려도, 그가 찾는 딱딱하고 길쭉한 물건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씨. 맞다. 소대장이 아까 빌려 갔지?”

 창수는 짜증을 내며 수첩을 아스팔트 바닥 위에 팍 던졌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되는 것 하나 없는 날이었다. 땅에 한 번 튀었다가 올라온 수첩은 그가 가장 많이 넘겨 본 페이지를 저절로 펼쳐서 보여주었다. 창수는 자연스럽게 귀퉁이가 문드러진 군용 수첩의 첫 페이지를 보게 되었다.

 “복무, 신조…… 우리의, 결의!”

훈련소에서부터 매일 밤 취침 전에 복창해 온 육군복무신조. 그는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들어 나지막이 읊조렸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이다…… 같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아씨. 대체 언제 끝나냐, 이거?”

 창수는 가래를 모아 멀리 침을 뱉었다. 다른 전우들과 섞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옳다구나 하고 그늘을 찾아 무리에서 벗어났다. 난리 통에 일기를 쓰며 혼자만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리란 기대에 부푼 그였으나, 군대는 늘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안에서, 그는 가래침 멀리 뱉기의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혼자만의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약 열 번의 침을 뱉고 나자, 저 멀리서 부대원들을 집합시키는 중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휴식 끝! 모두 소대장 앞으로 신속히 헤쳐 모여!”

 “헤쳐 모여!”

 창수는 입을 움직이는 시늉만 하면서 소총을 메고 달려갔다. 창수 외에 군기가 바싹 든 11공수여단 63대대 2중대 3소대의 병사들은 눈 깜짝할 새 소대장 앞에 분대별로 4열 종대를 이루고 섰다. 인원 파악이 끝난 이후, 소대장은 동네 노인들이 앉아서 시간을 보냈을 평상 위에 올라가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평상의 귀퉁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자! 모두 잘 들어라! 알고 있는 인원도 있겠지만,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이곳 광주에 파견을 나온 지 약 일주일이 지났다. 북한 간첩의 지시를 받는 폭도들답게 전우들에게 막심한 손해를 입히며 저항하고 있으나, 다행히 우리 여단을 포함한 국군의 우수한 대응체계 덕분에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대장은 오른손 검지를 하늘 높이 쳐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바로 어제, 5월 24일! 드디어 아군에서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무려 열 명! 부대 이동을 위해 산길을 통행하던 도중 매복하고 있던 적에게 노출되어 무차별 사격을 당했다고 한다. 격렬한 전투 끝에 다행히 적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들이 대규모로 희생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웃기고 있네. 창수는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여 재채기하는 시늉을 했다.

 아주 우리를 등신으로 아는구나. 이미 아군 간 오인 사격이라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난 게 언젠데 이제 와 저따위 거짓말을 내뱉는 거지?

 하지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병사는 소수였다. 대오의 앞쪽에 있는 병사들은 소리를 내지르거나 욕을 내뱉는 등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소대장은 그런 군중의 소란을 방관하며 병사들이 분기탱천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어제 그리고 오늘 호남에 들어와 있는 전군의 병사에게 모두 전파되었다. 자랑스러운 대한 육군의 모든 병사가 이 소식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저 악랄한 괴뢰군을 끝까지 박멸하여 전우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중이다! 그리하여! 혹시나 숨어 있을지 모를 적군을 모두 색출해내어 이번과 같은 참사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전 여단이 공유하고 있는바, 여단장님의 특별 지시 사항이 있으셨다. 거기 너! 구강석!”

 “병장, 구, 강, 석!”

 “이리 올라와라. 네 녀석이 목청이 좋으니, 여단장님이 직접 보내신 이 전달사항을 큰 소리로 읽어 전 소대원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구 병장은 신속하게 평상 위로 올라가 소대장 앞에 섰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소대장이 건넨 종이를 받아들고 예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전파사항을 읽기 시작했다.

 “전 여단 장병에게 전파한다. 5월 24일, 적군의 무자비한 매복 작전의 여파로 11 공수여단 장병 여덟 명을 포함한 열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에 본 여단장은 비통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다. 먼저 떠난 전우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은 장병들이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전투에 임해주길 바라며, 경계 작전과 괴뢰군 색출 작전에 더욱 철저히 임할 것을 명령한다. 이상 준장 최웅.”     

 “우오오오오오!”

 사기를 올리기 위해 사기를 칠 줄 아는 능력도 지휘관에게 필요한 역량인가? 창수는 다른 병사들을 따라 하며 손을 쳐들고 입을 벙끗했다. 사기의 주범인 소대장은 신이 나서 병사들의 함성을 부추겼다. 소리를 지르는 병사들이나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소대장이나 창수에게는 그저 냉소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 모두들! 이상과 같은 여단장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우리 소대는 이곳 송암동에서부터 철저한 괴뢰군 색출 작전을 시작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분대장들 통솔하에 각자 담당 구역 나누고, 임무 분담 끝난 분대는 신속히 출발해라!”

 창수는 분대장인 구 병장 앞에 헤쳐 모인 1분대의 무리에 합류했다. 소대원들 앞에서 목청을 과시한 구 병장은 신속하게 분대원들에게 담당 구역을 하달했다.

 “너, 너! 너희 둘은 저기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대문이란 대문은 전부 열고 들어가고, 집 안에서도 방문은 전부 열어 재껴. 거기 사는 민간인 말 믿지 마. 붕대 감고 있거나 피 흘린 자국 있는 사람 있으면 무슨 말을 하든 끌고 나와서 소대장님께 인계해. 조사는 소대장님이 하시니까.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창수, 창수는 나하고 요 정면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좋아, 전달사항이 이해되지 않는 인원 있나?”

 “없습니다!”

 “그럼 다들 출발해!”

 짬이 낮은 일, 이병들은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분대 내에서 가장 고참에 속하는 창수와 구 병장은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으, 대체 언제 끝나냐, 이거. 말년에 아주 제대로 고생하네.”

 “무슨 고생을 하셨습니까. 괴뢰군 한 명이라도 잡은 적 있으십니까?”

 구 병장과 창수는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이 한심한 남정네들 사이에서도 구 병장만큼은 유일하게 창수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방금 말 시정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그렇게 단상에 올라가서까지 크게 지른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소대장은 겨우 목소리 크다는 이유로 꼭 그런 걸 구 병장님 시킵니다?”

 “그놈의 합창단, 사회에서 뭐 하다 왔냐는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한 내가 바보지, 으휴.”

 “뭐, 우리 학교 합창단이 워낙 입부 심사가 까다로우니까, 소대장이 사람을 잘 보긴 했습니다.”

 창수와 구 병장은 같은 학교의 선후배 사이였다. 창수는 본인보다 한 학번 선배인 구 병장을 잘 따랐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려심 많은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갔다. 그는 폭력과 욕설에 관해서는 거의 결벽증 환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쌍욕이 기본적으로 입에 박혀 있는 공수부대 막사 내에서 그의 그런 모습은 일견 유약함으로 비칠 수 있었으나 그는 본인의 능력으로 그런 평가를 불식해 나갔다. 훈련에서나 작업에서나, 구 병장은 모범적으로 후임들을 이끄는 좋은 선임의 표본과도 같았다.

 그런 그였기에, 광주에 들어온 이후에 눈앞에 벌어진 참상이 그의 섬세한 정신세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몰라 창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구 병장을 보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날이 갈수록 핼쑥해져 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구 병장이나 창수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고 태어나 처음 보는 시체와 부상자의 행렬은 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창수는 부디 이 일이 마무리되기까지 구 병장이 굳건히 버텨주기만을 바랐다. 


 “제가 오른쪽 맡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창수와 구 병장은 찢어서 각자 수색을 개시했다. 군화를 신은 채로 대청에 올라선 그는 페인트인지 종이인지 알 수 없는 재료가 덕지덕지 발린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안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넓은 방이 나타났고, 방의 구석에는 한 모자가 웅크린 자세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창수는 한 손을 뻗어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안녕하세요. 괴뢰군이 있는지 없는지 수색 중인 국군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천천히 제 질문에 대답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예에에…….”

 “예. 현재 이 집에 상주하고 있는 괴뢰군은 없지요?”

 “아유, 예에. 당연하죠. 당연하죠.”

 “예. 어제나 오늘 사이에 괴뢰군이 방문한 적도 없으시고요.”

 젊은 엄마는 아이의 조그마한 머리를 꼭 껴안고 애처롭게 대답했다.

 “예,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집을 한 번 수색해 봐도 괜찮을까요?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집에 괴뢰군이 숨어든 사례도 보고된 적이 있어서요.”

 “예, 하세요. 하세요.”

 여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애원하듯 말했다. 창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안방을 빠져나왔다. 괴뢰군 적발이 보고된 사례라고 해봤자 변소에 숨어 있다 걸린 것이 전부였다. 창수는 과연 그 사례가 진실인가조차도 의문이 들었다.

 샅샅이 수색하라고 명령했으니, 시간도 보낼 겸 살살 돌아다녀도 되겠지? 두고 봐라, 절대 구 병장보다는 많이 안 할 거다. 창수는 변소를 시작으로 부엌과 창고를 대충대충 뒤지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애초에 이 동네에서 적군을 발견할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보짓을 하다가 아군을 서로 죽인 분을 시민에게 풀려는 수작이었고, 창수는 부디 그 얕은 구실에 걸려서 애먼 목숨을 잃을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창고를 다 뒤진 그는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고추장과 간장을 담아 놓은 장독대 여러 대가 보였고, 사람이 몸을 숨길 장소는 한눈에 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창수는 그 자리에 잠시 그 자리에 서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건물이 햇볕을 가린 덕에 시원한 그늘이 마련되어 있어서였다. 그늘은 그의 기분을 다시 좋게 만들었지만, 그늘에서부터 연상된 일기와 펜의 부재와 구 병장의 존재는 다시 그의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저, 아저씨.”

 “응?”

 창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리기만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 꺾을 필요도 있었다. 엄마 품에 안겨서 몸을 떨던 그 소녀는, 물을 담은 사기그릇을 두 손에 들고 내게 내밀었다.

 “어, 어어어…… 고맙다. 아저씨 목마를까 봐 주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창수는 시원하게 목을 축였고, 물을 다 마신 후에는 가벼운 트림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후우, 잘 마셨다. 너 참 착한 아이구나.”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착한 사람이에요!”

 “내가? 내가 뭘 했다고.”

 “아, 아저씨랑 같은 옷 입은 사람 중에서 아저씨만큼 착한 사람은 못 봤어요! 정말이에요! 다, 다들 욕하고, 소리 지르고, 그랬는데 아저씨는, 아저씨는 안 그래써요!”

 칭찬을 들은 창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 그랬구나. 그 아저씨들이 참, 나쁜 아저씨들이네.”

 “다른 아저씨들은 막, 욕하고, 소리 지르고, 막 부수고, 뺏었어요. 막, 물건도 훔쳐 가고, 돈도 뺏어가고, 또, 또…… 아빠도…….”

 창수는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이 있나 주머니를 뒤졌으나, 이내 손수건 역시 펜과 함께 소대장이 가져갔음을 상기했다. 창수는 혀를 한 번 차고 아이를 끌어안아 그의 얼굴을 군복의 어깨에 파묻었다.

 “미안하다. 아저씨가 지금 손수건이 없어서, 잠시만 이러고 있어라. 물 가져다준 보답이야.”

 “으으으으, 으으으…… 아빠가 안 와요…… 으으으…… 금방 온다 그랬는데, 아직도 안 와요…….”

 오른쪽 어깨가 촉촉이 젖어가는 감촉을 느끼며, 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그가 마음속으로 힐난하는 대상은 계엄군뿐만이 아니었다. 차마 아이 앞에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창수는 솔직한 마음으로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원망을 품었다. 이렇게 애가 어린데 굳이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독재 타도가 뭐라고, 똥 밭에 굴러도 가족과 같이 있는 게 낫지.     

 한동안 아이를 안고 있던 창수는 엄마에게 안전하게 아이를 인계했다. 창수는 이 여인이 자신에게 물을 대접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이야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그랬을 수 있지만, 그 허락을 내린 어른은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을까. 창수는 떠나는 자신에게 허리를 푹 숙인 그녀의 모습에서, 그 의도는 별것이 아니고 다만 비굴함과 절박함을 담은 일종의 애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창수는 고개를 까딱한 후에 파란색 대문을 밀고 나왔다. 마음도 무거워진 김에 이후의 수색은 한 층 더 대충해야겠다. 국군이라 불리는 진압군에게도 괴뢰군이라 불리는 시민들에게도 그는 감정을 이입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단행동을 싫어했다.

 집단은 언제나 흠결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의지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한발 물러서서 그 흠결을 보고 인상을 짓기만 하는 방관자였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대상들과는 항상 거리를 두고 살려는 자세를 유지해왔다. 

 소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주체적인 그의 인생관은 계엄군으로서 광주에 들어섰을 때도 유지되었다. 위에서 명령을 내렸다고 곧이곧대로 시민을 짓밟는 군인들도 혐오스러웠고, 맞고 다칠 걸 뻔히 알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광주 사람들도 그의 눈에는 한심해 보였다. 나름의 윤리를 관철하는 차원에서 그는 18일 이래 일주일간 단 한 명의 시민도 사살하지 않았다. 늘 대열의 뒷줄에 들어갔고 사격할 때는 일부러 사람 옆의 차나 전봇대를 맞췄다. 

 물론 그것이 시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막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창수는 그 부족함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시민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고, 가끔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눈물을 닦아줄 줄도 아는 선량한 청년. 그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울을 보며 세수를 할 수 있었다.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구 병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워낙 여리니까, 그 사람은.     

끼익, 탕

창수는 무심하게 몸을 돌린 후 파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이내 문이 닫힐 때 들린 탕 소리가 문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음을 알아챘다. 파란 대문 집에서 골목 안쪽으로 약 10m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길 한 가운데 하수구가 하나 나 있었다. 소총을 든 구 병장은 한 하수구 위에 서서 총구를 아래로 겨누고 있었다. 그의 총구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나는 중이었다.

 “구…… 병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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