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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Apr 14. 2022

안녕, 세콜리

01. 회피의 모습(Denial)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 소녀는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죠.

소녀의 눈에 비친 세계는 어떤 모양일까요?

표정 없는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에는 완고함마저 있죠.

그는 세상을 응시하고 있지만,

순수하고 부드러운 꽃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벌과 나비가 날아와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소녀에겐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어쩌면 그의 세계를 지키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이 카드의 이름은 Denial. 회피라는 키워드를 가졌습니다. 세상의 비열함과 더러움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죠. 현실을 부정하고 저절로 해결되길 바라며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속에 뭉개 뭉개 해무가 밀려옵니다. 연락이 끊인 줄 알았던 오랜 지인과 다시금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가움에 햇살이 쨍하니 내리다가 이내 어둑어둑 해집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와 이야기 나누길 즐기던 제가 더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그리고 상대도 그걸 느끼고 있습니다. 웃으며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이 시간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쁜 기억이 될 필요가 없으니 그저 의미 없는 대화로 회피해보는 겁니다.





 사실 그 어색한 기류가 흐른 것은 제 근황을 알리면서 였습니다.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말에 반색하다가 단순히 취미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이내 염려를 담은 한 마디를 던집니다.



 "언니, 언니의 능력을 폄하하는 건 아닌데. 솔직히 그건 불가능이지. 전공을 살릴 수도 없을 거야. 학원이라도 차릴 거야? 아니면 연주자를 할 거야? 내 친척 동생도 지금 독일에서 피아노 전공하고 있고, 내 전 애인도 미국에서 피아노 전공자야.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하는데. 게다가 27살 나이에 벌써 경력도 20년이야. 언니가 어린 시절에 음악을 배웠다면 몰라. 아, 그냥 언니가 그 선생님의 달콤한 말에 끌려다니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스러워. 사실, 언니가 이제껏 해온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도전하는 거야?"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생각했죠. 그러게요. 왤까요? 사실 선생님께서 권하신 건 사실이지만 선택은 제가 했죠. 그러니 선생님께 끌려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확실했죠. 재능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글 속에서 혹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어온 이야기를 이 아이의 입에서도 나온다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서운하기도 하고, 이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아이라면, 과거의 그 아이라면 응원을 보냈을 겁니다. 무모한 일에도 도전하고 행동하기를 꺼리지 않는 멋진 아이라 동경해왔기 때문이죠.




 그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있지 않은 채 어린아이로 머물고 있는 것은 저일지도 모르죠. 저 그림 속 소녀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귓가를 가득 장식하고 쓴소리에 마음도 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힘들 때면 그렇게 도망쳐왔으니까요. 골방에 숨어 이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저의 세상에서만 빠져 사는 것이 익숙하니 지금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그에게 해 줄 대답이 없었죠.




 "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히 선생님의 권유가 나를 기쁘게 하고 이 세계로 나를 데려와주셨지만, 그 문을 건너간 건 나야."




 하고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사실 이 대답은 어쩌면 그 친구에게 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힘껏 대답하고 싶어 졌습니다. 지금을 똑바로 보고 지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지금 당장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보여줄 것이 현재는 없기 때문이죠. 저는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더듬더듬 하나씩 서툴게 내어봅니다.




 "네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일지 알아. 나도 사실 믿지는 않아. 걱정하지 않는다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야.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까운 도전이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어도 거기까지 일 수도 있어. 그런데 난 지금 이 여정이 참 즐거워. 이렇게 나를 열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여태껏 없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성장을 기대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를 가슴 뛰게 하고 살게 하고 있어. 비록 나는 이걸 위해 예전에 해온 것들을 버려야 했어. 내 정체성과 같았던 레이스 가득한 옷을 팔았고, 만화책도 팔았지. 게임도 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바라 왔던 하루를 살고 있어. 내가 만족할 만큼 열심히 말이야. 글쎄, 이 여정의 끝이 어떻게 될까? 어떤 모습으로 내가 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년 후 내 모습은 지금과 다를 거야. 내가 있는 자리도 달라지겠지. 분명히 말이야. 기왕이면 내가 원하는 자리이길 바라지만 아니라도 괜찮아. 나는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 음악을 하기 위해 글을 쓰고, 공부하고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나는 지금 지내고 있는 하루가 꿈같아. 그냥 내게 이루어진 꿈이야. 그러니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하고 대답하고 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저는 언제나 열심히 했다는 기억 하나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타인들이 열심히 살았다 말해도 제가 만족할 만큼 열심히 산 기억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하루를 떠올리면 힘듦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습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저 카드를 떠올려봤습니다. 아마도 저 카드가 제게 한 질문은 현재를 직시하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었던 듯합니다.




  회피처럼 보이는 지금은 제 인생 어느 순간보다 또렷하고 당당하게 앞을 보고 걷고 있습니다. 오히려 회피는, 귀를 막고 있는 아름다운 꽃은, 포기할 핑계를 만들어주는 수많은 이유입니다. 나이가 많아서라든가 현실적인 문제. 지금 당장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미래에 어떤 이득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확실성들. 사람들은 때때로 이것들로 현실을 재단하면서 현실을 포기합니다. 형태 없는 잣대로 말이죠. 마치 세상이 말하니 진리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 나를 깎아내리거나 틀에 가두는 모든 것입니다.




 제 얼굴에 그 순간 화색이 돌면서 머릿속이 시원하고 말끔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들떠 이렇게 말했죠.




 "고마워! 덕분에 나 더 명확해졌어! 요즘 계속 의기소침했는데, 나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하곤 핸드폰을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니 악보도 잘 보입니다. 손가락은 아직도 둔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지금 막 걸음마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알고 있고, 내 속도로 가고 있습니다.






안녕, 세콜리.

너에게 대답할게.

네가 말하는 회피는 어쩌면 내 불안일 거야.

내 귀에 앵앵거리며 돌아다니는 걱정일 거야.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나를 주저앉히는

의미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이야.

그러니 '걱정'이라는 말로 나에게 오는 달콤함은

이제 벗어놓고

나를 그곳으로 보내줄 쓴소리를 들을게.

고마워, 세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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