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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Mar 14. 2022

Andante e Cantabile

  집으로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는 것도,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피로가 밀려왔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흔들림이 느껴졌습니다. 살며시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공기가 공간을 미묘하게 뒤틀며 흔들립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흔들림. 바람이 집을 감아 날카롭게 날을 들어 난도질하는 느낌. 그것이 갑작스럽게 제주를 흔든 진도 4.9 지진이라는 것을 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정신이 깨어납니다. 주변의 안녕을 살피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선생님이셨죠.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괜찮으세요"라는 말을 작성하곤 멈춥니다. 그런 말을 물어도 될까요? 안부를 물어도 될까요? 쓰다 지우기를 몇 번 반복하곤 용기 내어 겨우 안부를 묻고, 끝에는 오늘 일을 사과드리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 후 어지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습니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가슴만 먹먹하고 마음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 날입니다. 내내 들리던 심장소리가 다시금 멈춘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핸드폰 진동에 눈만 말똥말똥 떠서 확인하니 답문이 왔습니다.





-이럴 때가 있어요. 다음 주에는 좀 더 단단해져서 오셨으면 해요.







 깊은숨을 뱉어도 답답합니다. 슬슬 가슴속에서 열감이 올라옵니다. 용암 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처럼 무겁고 통증도 생겼습니다. 뼈 마디마디도 아파옵니다. 몸살이 왔습니다. 몸은 아파오는데 정신은 오히려 맑아집니다. 생각을 멈춰주면 좀 나아지련만 이 아이는 계속 제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에 어떻게 수업을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도망을 쳐볼까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도망가고 싶지 않습니다. 도망을 칠 수 있다는 건, 이걸 버려도 살 수 있다는 여지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겁니다. 이 마음이 집착이든 사랑이든 저는 도망을 칠 수 있을 만큼 여유도 없을뿐더러, 도망을 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이 아이가 나를 다시 붙잡아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나 확신도 없습니다. 짝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지독한 짝사랑. 몸도 마음도 갉아먹는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단단하게





 아, 지긋지긋합니다. 저 소리가 너무나 지긋지긋합니다. 어떻게 단단해지라는 건가요? 충분히 오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강하지도 않으면서 척이라도 하고 있는데 얼마나 더 강해지라는 말인가요? 왜 세상은 내게 강해지라고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귀를 막고 눈을 꽉 감아봅니다. 눈을 감으면 빛의 무리가 꼬리를 달고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려갑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온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이불속에 가두고 숨을 참아봅니다. 눈물이라도 나오면 시원하련만 뜨끈한 열꽃만 온몸에 피어오릅니다. 숨을 뱉어내니 열기가 빠져나갑니다.





 새벽 푸름이 눈부시게 합니다. 잠이 들지 않습니다. 정신은 말끔한데 몸의 고통만 더해갑니다. 순간 코로나인가 싶어 냄새를 맡아보곤 이런 제 모습이 웃겨 피식 웃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전염병을 걱정하다니........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그저 몸에 힘이 다 빠졌을 뿐입니다.





 가만히 누워 눈을 깜박거리다 다시금 숨을 얇고 길게 불었습니다. 생각을 없앨 수 없다면 흘러가게 두기로 했습니다. 방 한쪽 벽에 걸린 고상을 누운 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 강해지지 않으면 사랑조차 할 수 없나요? 어떻게 강해지죠? 어떻게 단단해지죠? 난 더는 부릴 오기도 없어요. 부릴 허세도 남지 않았어요."




 하곤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습니다.




 꿈을 꿨습니다. 금빛 햇살이 내리는 곳. 그곳을 그립게 바라봅니다. 창 밖으로 사람들은 지나가지만 저를 보진 못합니다. 하얀 지젤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예쁜 장식을 올렸어도 아무도 저를 보지 않죠. 저 햇살이 내리는 곳. 그곳으로 간다면 사람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제 자리 하나 있을까요? 거울을 통해 바라본 저는 아름다워서 어색합니다. 그때 누군가 저를 부릅니다. 이제 저 무대로 나갈 시간이라고 합니다. 떨리는 것이 아니라 벅차도록 행복한 기분. 이 어둠에서 나가면 전 사람들과 만날 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벅찬 마음에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익숙한 천정이 눈에 비칩니다. 아, 꿈이었습니다. 눈을 다시 감으면 그곳으로 돌아갈까요? 알고 있습니다. 꿈은 단지 꿈이죠. 저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열이 더 오른 듯합니다. 하지만 정신은 이렇게 맑을 수가 없습니다.





 '난 강하지 않아. 충분히 오기를 부렸어. 이제 더는 오기를 부릴 순 없어. 강해지지 못해. 어쩌라고. 이게 나인걸. 예민하고, 애정결핍으로 똘똘 뭉친 게 나야. 독하지도 못해.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노력해왔어. 아, 지긋지긋해. 도대체 나는 왜 따라만 다니는 거야? 그만 따라다닐 거야. 너도 그만 도망가! 나는 그냥 나야. 선생님에게 버림받을까 봐, 부모님에게 버림받을까 봐, 옛날 할머니에게 버림받았듯 그렇게 버려질까 봐 항상 전전긍긍 노력해온 게 나야. 그만해!'





 하고 눈을 가만히 감았습니다.





 '단단해진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가르쳐줘.'





 라고 마음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귀가 먹먹해 옵니다. 열이 더는 제정신도 맑게 두지 않을 생각인가 봅니다. 그렇게 깨어나면 열에 들떠 화를 내다가, 다시금 잠들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다 보니 두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곤 묻습니다.





 '넌 어떤 아이인지 기억해?'



 '나는 어떤 아이었더라. 그래, 좋아하는 게 많아. 작은 풀꽃. 바람이 부는 것.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아무도 거리에 없으면 노래를 불렀어. 가사도 노래도 내 마음대로. 그게 참 즐거웠어. 난 누군가를 이기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만족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어. 사실 누군가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그저 내가 조급했던 건. 그래, 인정을 받고 싶었구나.'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오기를 부리고 허풍을 떨면서 살아온 지난날이 떠올라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릅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었을까요?





 얼굴이 떠오릅니다. 나와 연을 맺었던 연인, 남을 이기는 즐거움을 배우라는 선생님, 나를 엄마의 고통으로 여긴 친척들, 가족으로 봐주지 않았던 사촌들, 그리고 아버지.





 그들에게 나도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쓰레기가 아니라고. 그저 무시만 해도 되는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마음이 있고 누군가에겐 소중할 수 있는, 나도 무거운 영혼 하나 가진 그런 사람이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설득할까요? 나 조차도 나를 소중하다 말할 수 없는데, 내가 나를 못 믿으면서 도대체 누굴 설득할까요?





 들떠오르는 열에 취해 하늘에 묻습니다.




 그래도 살아갈 권리. 누가 줄까요?

 내가 세상에 남아있을 자격 누가 줄까요?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단 하나는 누구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존재는?





 결국 '나'





 그렇게 받고 싶던 인정. 그렇게 받고 싶던 자격. 사실 남이 내게 준다 해도 제가 받지 않으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죠.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단 한 사람. 아무리 타인이 제 앞에 문을 열어도 가 건너지 않으면 그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결국 제 세상은 제가 만들고 현실로 이뤄냅니다. 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렇게 질리게도 말하던 말.




 "너를 용서해. 너를 믿어."





 결국 그 말은 가 단단해지도록 만드는 열쇠였음을 깨닫습니다. 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왜 남의 기준을 찾고 남에게서 무언가를 인정받으려 했을까요? 과연 내 열심에 남에게 보여주겠다는 그 이기심 없었을까요?






 "나이 들어 음악 하면 좋은 게 뭔지 알아요?"

 "글쎄요?"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비교할 대상도 경쟁할 대상도 말이죠. 그저 음악과 나. 그렇게 둘이서 걸어가면 돼요. 장난도 하고 농담을 나누고 진지한 대화도 가능해요.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좋죠. 1~2년 빨라지는 게 뭐가 의미가 있나요? 음악을 온전히 즐기며 간다는 건 축복이에요."






 그렇죠. 가보지 않은 길. 제가 지도를 만들며  안에 있는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글쎄요."

 "내가 보기엔 확실히 그래요. 좀 더 뻔뻔해져도 좋고, 좀 더 나를 과시해도 좋아요. 나를 믿어요. 내 앞에선 실수해도 좋아요. 마음껏 실패해요. 난 당신의 멘토로 여기 앉아 있는 거예요. 실패하면 내가 다시 길을 잡아주고, 실수하면 같이 웃어주고. 화내지 않아요. 어떻게 화를 내요? 얼마나 진심인지 알고 있는대. 얼마나 간절한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믿어요. 하나의 음에 단단하고 명확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서 또박또박 말을 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사라지지 않아요. 가지고 있는 내재율이 예쁘니까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고 사랑스러운 로맨틱한 소리. 그게 당신이 가진 소리거든요. 그러니 괜찮아요. 그 소리가 사라지지 않을 테니 믿고 단단하고 세게 건반을 눌러요. 가진 능력을 믿어줘요."






 나를 믿고,






 "이제 네 삶을 살아. 넌 할 수 있을 거야."






 저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 그려왔던 삶을 더듬어 그려봅니다. 처음 음악을 왜 하고 싶었을까요? 아름다웠어요. 그 세상이 너무 빛나고 예뻤죠. 피아노 앞에 앉은 선생님이 빛에 쌓여 빛나던 순간, 사람이 내는 빛을 보았죠. 어쩜 그렇게 아름다울까요? 저 또한 그렇게 빛나고 싶습니다.





 전 세상의 빛이 되고 싶어요. 아름답고 무해한 것으로만 저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좋은 향기를 채우고 따스함을 가득 담아봅니다. 누군가에게 빛이 되기 위해선 내가 빛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에 진심을 담을 수 있는 사람. 위로를 담은 달콤한 음률이 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요. 저는 제게 이 자격을 줄게요. 봄날이 되어볼게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죠. 사람에게 미소가 되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어려울까요? 하지만 가질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그걸 선택할 테니까요.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걸 할 수 있다는 나를 믿어요. 해낼 거예요.





 전 이제 절 허락할 생각이에요.

 이 세상에 전 필요한 사람이죠.

 그러니 저 살아볼게요.

 꼴사납게 넘어지는 오늘이 쌓일 테지만,

 이런 나를 사랑해볼게요.

 지질한 나로 살아왔던 어린 나.

 어쩌면 너무도 외로웠던 나를 안습니다.



 

 이제야 눈물 한 방울 볼을 타고 베개 위로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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