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선보가 마음대로 출렁거리고 음표는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루에 먹는 음식량이 줄었고, 밥 짓는 냄새가 역겹게 느껴집니다. 물에선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입술은 파랗게 질리고 얼굴은 하얗고 누렇게 들떠도 피아노 앞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 발 밑에는 보이지 않는 늪이 생겼습니다. 아니, 족쇄일까요? 걸음마다 무거운 돌덩이 하나, 끈적이는 저항이 느껴집니다. 그뿐이면 좋을 텐데 잠이 들지 않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괴로움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괴로움의 실체를 찾으려 마음과 기억을 뒤적입니다. 괴로운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와 현재의 시간을 멈추고 과거로 끌고 갑니다.
어렸을 때, 여름이면 중문으로 놀러 갔습니다. 파도가 높고 물의 깊이도 제법 있어 아이가 놀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죠. 그래도 전 물을 좋아해서 바다에 가는 것이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중문은 파고가 높고 물살이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조개가 살죠. 낮은 물가에서 손을 모래 속에 넣고 휘저으면, 어린 제 손으로도 조개 한 두 개는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안에 살이 없을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손을 더듬거리며 낮은 바다를 헤매다 딱 한 번 큰 파도에 휩쓸린 적이 있습니다.
파도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집중하던 제 위로 무겁고 거대한 힘이 눌려지고 허리를 감은 보이지 않는 손은 깊은 곳으로 저를 데리고 갑니다. 세상이 암흑이 되는 것은 그저 눈을 감았기 때문일 겁니다. 바다의 깊이가 제 눈을 가린 건 아닐 테죠.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건 순간입니다. 파도에게 필요한 시간은 스타카티시모. 그는 저를 품어 다른 세상으로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온 짠 물은 쓴 한약보다 독하고 빠르게 제 숨통을 막아냅니다. 물은 늪과 비슷해서 버둥거릴수록 더 세차게 끌어안고 입 맞추며 제 영혼을 빠르게 빨아들이죠. 차라리 순종하는 게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숨을 가만히 참아내면 몸이 가볍게 물 위로 떠오릅니다. 순종하는 자를 바다는 원치 않는지 가볍게 물 위로 몸을 밀어내죠. 그때 누군가가 저를 건져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낯선 이. 괜찮으냐 걱정스럽게 묻는 낯선 사람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다가 다정함을 받지 못하고 도망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분명 죽음이란 공포를 담은 기억인데, 저는 이 기분을 느끼면서도 두렵다는 마음보단 어쩐지 익숙한 느낌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낯선 이의 작은 걱정이 어쩌면 저를 살릴지도 모르지만, 살려주지 않는대도 저는 알아서 살아질 겁니다.
지금 저는 바닷물 속에 있습니다. 몸을 풀어내고 순종하면 떠오를 겁니다. 하지만, 저는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살고 싶습니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며 살고 싶다 온 몸을 비틀어대며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갔기 때문일까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먹먹한 물속에 떠도는 진동만 있을 뿐입니다. 피아노 건반이 부력 때문에 먹먹하고 눌러지지 않습니다. 건반의 뿌리는 너무 멀어 닿지 않습니다.
"오늘 이상해요. 연습을 안 하고 말고 가 아니라, 괜찮아요? 집중도 전혀 못하고. 무슨 일 있어요?"
저는 가만히 가방에 책을 넣으며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선생님, 악보가 보이지 않아요."
하고 힘겹게 말하니 아늑한 공간에 물이 가득 차오릅니다. 숨이 막혀오고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저, 조금만 앉아있다 가도 좋을까요?"
"당연하죠, 바닥에 앉지 말고 의자에 앉아요."
라는 말씀에 몸을 일으켜보지만 도저히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을 내밀어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의자에 앉도록 부축해주시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선생님, 정말 나이 들어 피아노를 시작하면 의미가 없나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퇴화하기만 하고, 늘지 않아요. 음악을 시작하고 9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6시간 7시간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했어요. 하지만 정말 늘지 않아요. 이제는 악보도 보이질 않아요."
"세상에! 6시간? 그리고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사람들 말이........."
그 말에 선생님의 음성에 노기가 서립니다.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요? 본 적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는 사람들의 말에 왜 일희일비하죠?"
저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있습니다. 저는 어째서 사람의 인정이 필요할까요? 사람의 허락이 필요할까요? 할 수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간절할까요?
"들어봐요. 나이가 들어 시작했을 때, 그래요. 확실히 피아니스트 정도의 스케일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죠. 어릴 적 음악을 시작했다면 지금 당신의 자리는 달라져 있을 테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확실한 하나. 과거는 지나갔어요. 아무리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흘러가버린 것은 그냥 흘러간 거예요. 음악을 하고자 한다면 무조건 3살에 피아노를 시작해 콩쿠르 석권하고 예중, 예고 나와서 서울대 음대를 가야만 하나요? 그리고 다음은? 유럽? 미국? 그러면 음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될까요? 아니요! 우리가 걷는 이 길 끝의 전경이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반드시 원하는 세상으로 보내줄 거예요. 얼마나 성장할지 어떤 음악을 하게 될지 궁금하거든요.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어요. 아무도 가지 않았기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죠. 얼마나 간절한지 알아요. 그리고 얼마나 불안한지 알고요. 얼마나 음악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는지도 알아요. 단지 시간이 필요해요. 천천히 가자고 했잖아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모르는 사람의 말보다 나를 신뢰해 줬으면 해요. 음악을 마주하는 당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나예요.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린 두 손가락 사이로 베어들 정도로 눈물이 쏟아집니다. 선생님께선 '아휴, 어쩌지?'하고 당황하셔서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요? 음악은 이렇게 말랑말랑 하면 할 수 없어요. 예술을 한다는 건 고통 속에 한 순간 행복만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에요. 이렇게 여리면 무너지고 말아요. 남들이 나를 감히 침범하게 두지 말아요. 단단히 벽을 둘러치고 지켜요. 단단해져요. 강해져요."
이내 잠긴 목 끝에서 숨겨놓았던 마음 하나가 고개를 듭니다.
"전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께서 절 내치실까 봐. 가망 없는 저를 포기하실까 봐 무서워요. 그게........."
"하아, 어떻게 제가 먼저 포기해요? 이렇게 간절한 사람을....... 그리고 난 한 번도 먼저 포기한 적 없어요. 학생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하고 고개를 드니 노기 어린 목소리가 어느새 사그라지고 얼굴 가득 떠오른 걱정과 다정함이 눈에 들어옵니다. 파도 속에서 나를 건져냈던 낯선 이와 시선이 겹칩니다.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선생님은 힘껏 저를 건져주신 겁니다.
"아휴,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쩌죠? 하긴 이런 마음을 가졌으니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곧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연습 6시간 안 돼요! 그건 연습이 아니라 학대하는 거예요. 오늘 돌아가면 무조건 쉬어요! 그리고 절대 2시간 이상 피아노 앞에 앉아 있지 말아요! 약속해요!"
전 긍정의 대답을 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힘을 내봅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긴 했지만 하늘은 어지럽고 바닥은 솜을 깔아놓은 듯 먹먹합니다. 몇 발자국 못 가 쓰러지니 선생님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택시를 불러주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비틀거리며 내려와 결국 길 한복판에 주저앉았습니다. 마침 전화벨이 울립니다. 어머니입니다.
-괜찮니?
"못 걷겠어."
하고 대답하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집에 어떻게 돌아온 걸까요? 열이 오르는 듯합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쓰러집니다. 다시금 무거운 파도가 몰려옵니다. 뜨겁고 무거운 파도는 저를 심연으로 데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