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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Mar 07. 2022

Andante e Cantabile

그 계절의 낙엽은 은빛으로 물든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수업이 끝난 후였죠.




 "혹시 바흐의 샤콘을 들어본 적 있어요?"

 "들어보긴 했지만 곡을 들어본 적은 없어요."

 "들어봐요. 음, 연주자는 예프게니 키신. 바흐의 샤콘은  이 사람이 가장 좋아요. 뭐랄까, 샤콘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진 곡이 아니에요. 들어보면 알겠지만, 뭐 그래요. 대학에 가면 마지막 학기쯤 하려나? 어려운 곡이에요. 들어보면 이율 알 거예요."





 그날은 부흐빈더의 공연을 가기 전,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서울로 떠날 준비 하며 다이어리에 그의 이름을 적어놓았죠. 공항에 가는 길, 버스에 앉아 예프게니 키신의 샤콘을 들었습니다. 바흐의 샤콘은 바흐가 바이올린 곡으로 만든 것을 부조니가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비극적인 감성을 폭발하지 않고 절제하며 아름다움 속에 감춘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그러니 좋다든가 싫다는 감정으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름답다든가 혹은 애처롭다는 하나의 단어로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죠. 그러니 도무지 부풀어 오르는 감정 달랠 수 없습니다. 떨리는 마음은 존재해도 그 이름 하나 선택할 수 없는 부족함에 감정만 복받쳐 오릅니다.





 저는 감정이 들면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그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죠. 이름이 생긴 감정은 팽창하지 못합니다. 그릇에 담기면 형태를 알게 되고, 그럼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름은 감정을 제한시키고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가슴속 깊게 쇠사슬에 꽁꽁 묶인 금속상자 하나가 덜컹거립니다. 열어달라, 풀어달라 성화를 부립니다.





 지금은 무섭습니다. 자유롭게 커버리는 감정.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건 공포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샤콘은 계속 그 상자를 풀어내라 재촉합니다. 그 속에 있는 것을 풀어내야 이 곡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말이죠.




 저는 음반을 앱으로 듣는 것보다 CD로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음질은 확실히 앱으로 듣는 것이 깔끔하지만, 지워지지 않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죠. 그리고 CD플레이어가 돌아가며 느껴지는 진동이 가끔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을 방문한 내내 예프게니 키신의 음반을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음반을 찾을 수 없었죠. 살짝 도는 실망감을 차마 모두 감추질 못하니,




 "누가 알아? 갑자기 예프게니 키신이 내한해서 직접 들을 수 있을 수도 있지."




 라는, 언니의 위로를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래도 그 아쉬움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그 여행에서 저는 최고의 베토벤을 들었으니까요.







 제주도에 돌아와 몇 주가 지났습니다. 스튜디오의 공기는 한순간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변하고 습니다. 에어컨은 쉼에 들어가고, 난로가 새롭게 식구로 들어왔습니다. 세상은 서서히 모습을 변화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코로나를 이겨내기보다 함께하는 방향으로 방역이 변화합니다. 새로운 바람에 마음도 느슨해지죠. 어쩌면 끝나지 않을 듯 보였던 시기가 끝을 맺는 듯합니다. 기온은 점점 떨어져도 봄이 오는 듯한 기분. 그 기분 탓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제 서운함을 기억하셨던 신의 선물이었을까요?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뾰로통한 표정으로 기사를 읽던 중, 제 눈을 번쩍 트이게 하는 기사 하나를 발견하곤, 침대에서 펄쩍 뛰어올라 집안을 빙글빙글 돌며 까르르 웃습니다. 발걸음이 가벼워 마치 발레리나가 스텝을 밟는 기분입니다. 그가 옵니다.



 저는 '고맙습니다'하고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죠. 하지만, 키신에게 가는 길, 쉽지 않았습니다. 선예매를 위해 유효회원 가입까지 했지만 결국 정면 좌석은 제 실수로 놓치고 겨우 어떤 자리라도 예매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죠. 그래도 예매라도 할 수 있음에 마음이 편합니다. 그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번에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샤콘은 없었지만,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이 기대감을 상승시킵니다. 들뜬 기분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예프게니 키신. 이 시대 천재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거장입니다. 선율이 아름답고 섬세합니다. 현의 느낌. 아주 가는 비단실을 손으로 엮어가는 듯하죠. 그의 손에서 엮어지는 비단실은 원색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을 가지고 있죠. 어쩌면 화려하지 않다 말할 수 있지만, 우아하고 고상한 색체가 있어서, 공기에 수를 놓았을 때 보이는 전경은 귀부인처럼 고상한 화려함을 보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의 빛이 수수하다 해서 그의 음악이 수수하다 말할 수 없죠. 크림처럼 부드럽게 스며드는 달콤함.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그저 부드럽고 여성스럽지만은 않습니다.






 자,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떨리는 마음을 그대로 풀어놓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자리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린다 한들 누가 볼까요? 어둠은 제 감정을 숨겨줄 테니 그에게 기대 마음을 놓고 키신의 음악에 집중합니다.





첫 곡은 바흐의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 565




 엄중하고 근엄하게 첫 장을 열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추슬러 강단 있게 건반을 날카롭게 베어냅니다. 불안정한 마음이 차가운 바람을 태우고 공간을 물들입니다. 밖은 아직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놓지 못했지만, 고요한 겨울을 데리고 옵니다. 눈송이를 담은 옅은 실타래가 공간에 스며 눈을 내린다 한들 그것이 반드시 추위를 가져오진 않습니다. 겨울의 진정한 의미는 휴식입니다.





 겨울의 세상에서 살아온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떠나보내야 하는 인연. 한국으로 오기 불과 몇 달 전, 그의 세계를 만들어준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이며 스승인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그는 선택해야 합니다. 멈출까요? 아니면, 아니라면 이 빈자리 무엇으로 채울까요? 그는 담담하게 단조에 담습니다.





 당신이 주신 세상을 살아갑니다.

 혼자 남을 시간이

 언젠가 오리라는 건 알았음에도,

 당신을 향한 사신의 칼날이

 오늘은,

 오늘만큼은 빗나가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당신이 보여준 세상의 빛이 내게도 태어났고

 존경과 동경으로 그대에게 기대 자라난

 금빛으로 물든 세상을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대가 있는 그 세상으로 닿고 싶은 아이.

 전 그렇게 당신이 언제나 그립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보다 빨라서,

 이번에도 새로운 세상으로 먼저 나아갑니다.

 전 그저 이 자리에서 물끄러미

 당신이 잠든 침대에 기대

 그대의 휴식에 눈을 감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번에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다음 세상의 빛을 배우러 갈 때까지,

 여기에서 당신에게 받은 모든 것을 엮어

 선율로 그려내는 자수를 담아 가슴에 새기고

 이 길의 끝에 서면 다시 저를 위해 그 문을 열어,

 새로운 세상으로 저를 다시 한번 이끌어주십시오.

 오늘 세상은 은빛으로 수를 놓습니다.

 부디 은빛으로 물든 낙엽이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올라,

 당신이 계신 곳까지 전해지기를..........




 

 먼저 사랑하는 이를 보낸 그는 하늘로 이별 편지를 보냅니다. 1부는 그렇게 가슴에 담은 그리움을 풀어내는 레퀴엠처럼 진중하게 울립니다. 그의 슬픔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게 되는 건, 제 가슴에도 그런 사람 하나를 품고 있는 탓입니다. 하루가 지나고 연이 깊어지면서 더욱 그의 세상으로 닿고 싶어지는 마음. 스승을 바라보는 제자의 마음은 어쩌면 연인을 가슴에 품는 것보다 더 무겁고 사무치는 것일까요? 부모를 바라보는 마음과 같아서일까요? 이별의 때가 올 것을 알면서 외면하고 있는 제 마음을 돌려 현실을 보게 합니다.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떠나보내기 아쉬워 여기에 머물고 싶지만. 그래요, 저도 그도 벗어나야 합니다. 그가 내게 해 준 모든 것. 그가 기꺼이 내어준 보석을 두 손에 꼭 쥐어봅니다.






 그의 2부가 시작됩니다.

 쇼팽의 Mazurka No.5 in 내림 B Major, Op.7, No. 1





 그에게 단 한 곡을 청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쇼팽입니다. 특히 쇼팽의 마주르카는 쇼팽이 그의 고향 폴란드를 그리워하며 어릴 적 들었던 폴란드 민속춤곡 마주르카에 영감을 받아 만든 곡입니다. 3박자의 경쾌한 박자감이 사랑스러움을 더 고취시키죠. 저도 모르게 몸을 흔들고 발을 살살 구르게 됩니다. 폴란드가 가진 순박하고 꾸밈없는 삶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죠. 어쩐지 제게 마주르카는 아이가 되어 살살 춤을 추고 싶게 만듭니다. 격렬하지 않게, 조심스럽고 귀엽게. 발 하나하나 놓으며 추고 싶어 지죠.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워지는 건, 그 안에 담긴 비애의 정서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슬픔과 천진함, 행복과 불안. 어울리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말하게 됩니다.





 저는 이 길을 걸어갑니다.

 당신이 누워있던 그 방에서 나와,

 언제나 그랬듯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이 옆자리의 온도는 아직도 따뜻합니다.

 아직도 이렇게 당신의 영혼이 느껴집니다.

 든든한 당신의 품에 기대 무엇이든 연주합니다.

 피아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주었죠.

 이 앞에선 당신과 다시 만날 테니

 어떻게 떠나겠어요.

 오늘은 저의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밖에 내리는 낙엽은 곧 눈이 되어 세상에 쌓일 테니

 당신과 내가 이야기 나누던 그 길고 그리운 계절.

 그 빛을 오늘은 제가 이 공간으로 가져올 테니

 저의 손을 잡고,

 당신이 돌아가야 할 샛별이 뜰 때까지.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집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는 이 찬사의 주인공입니다. 그의 모든 마음은 공간에 녹여 세상을 은빛으로 물들었다가 마땅히 그가 서 있는 자리의 금빛으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에게 보내는 찬사가 박수보다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공연이 끝난 세상. 찬 바람 한 줄기 실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살짝 얼음의 차가운 맛에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내가 납니다. 다시금 그의 음악을 귀에 담으며  돌아갑니다. 흔들리는 지하철의 진동. 까만 밤 무겁게 날리는 낙엽 하나. 은빛으로 물들어 흔들리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 주는 스승의 답장일까요? 아니면 오늘 밤 그의 음악을 들은 누군가가 떠올린 그리움에 보내는 편지일까요?





 은빛으로 물드는 가을밤. 그립고 아름다웠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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