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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17. 2023

시간의 영속성 위에

파리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닉은 미국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8살이나 어렸지만 굉장히 성숙해 보이는 닉과 나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닉은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한국에서 왔고, 5년간 방송작가일을 했으며, 지금은 여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조식을 먹으며, 닉은 오늘 저녁에 프라하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도 오늘 저녁에 프라하에 가는 스케줄이었다. 동시에 휴대폰을 열어 예매된 비행기표를 비교해 본다. 이럴수가! 우리, 같은 비행기였어.

 

각자 남은 파리 일정을 소화하고, 우리는 오를리 공항에서 다시 조우하기로 했다. 좌석을 나중에 결정하는 시스템이어서 닉은 내 뒷자리를 선택했다.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니 유명한 브랜드의 마카롱 판매점이 보였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마카롱 한 상자를 샀다. 페이스북 메시지로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닉을 공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체코가 체코인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체코를 ‘첵’이라고 발음했다. Check the Czech!이라며 닉이 드립을 선빵했다. 첵더첵! 나도 닉의 드립을 따라했다. 우리는 몇 번이고 첵더첵을 남발했다. 그리고는 중고등학생들처럼 낄낄거렸다. 함께 지루해줄 재밌는 친구가 있다면, 길고 지루할 첵-인이 길어서 이처럼 좋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프라하 공항에 도착하자 닉의 친구 로렌조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고맙게도 두사람은 도착한 첫날 나를 숙소 근처까지 에스코트해주었다. 그럼에도 숙소를 찾는 건 꽤나 어렵긴 했지만. 다음날 우리는 켄지라는 한 명의 친구를 더 불러 넷이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프라하의 4월은 봄이 오지 않은 봄이었다. 하늘은 낮고 파랗고, 좁은 골목 이곳저곳에 찬바람이 겨울처럼 할퀴고 지나갔다. 놀이동산같이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은 프라하를 오래 걸으며 어느새 지친 우리들은 가까이 보이는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닉은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내 몫까지 주문해주었다. 시큼하고 쓴맛이 났다. 한모금 머금자마자 함께 앉은 네 명 모두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재밌는 맛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거나 데운 와인을 우린 꽤 많이 마셨다. 아마 추운 날씨 덕분이었을 거다.


닉과 켄지, 로렌조는 영어가 약한 나를 위해 거의 알아들을 정도의 쉬운 말만 해주었다. 덕분에 내내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닉은 로렌조가 프라하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참지 못하고 그새 서로의 직업과 전공을 소재 삼아 어설픈 영어로 드립을 건넸다. 그러면, 로렌조는 돈을 많이 벌 거고, 닉은 화학을 많이 만들거고, 나는 단어를 많이 만들겠네. 닉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맙게도 웃어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오직 단어와 글만이 영원히 남게 될 거야.


짧았던 하루의 동행이 끝나고, 우리는 프라하 시내를 배경으로 함께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 언젠가 또 보자는 인사도 함께. 헝가리로 가는 길에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국경을 넘어가는 6시간의 기차 안에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내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 여행은 먼 과거가 되었고, 스물아홉의 나는 서른일곱이 되었다. 일상은 평범하고 지루해졌다. 그래도 희노애락을 적절히 분배받은 덕분에 삶에 틈이 벌어질 때마다 길고 짧은 글을 쓸 수 있었다. 감정의 골짜기에서 마음으로 적어낸 글들이기에, 이토록 변화로운 세상에서도 어쩌면 존재의 의미가 하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로 남겨진 기억의 시간에 위로받고 지나가버린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했다. 닉의 말이 맞았다. 모든 건 사라지지만 오직 단어와 글만이 시간의 영속성 위에 서 있다. 그날의 닉의 격려도 결국 이렇게 글이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욕심이기도, 욕망이기도 했다. 영원히,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20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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