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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Dec 24. 2023

그 시절의 향기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간 종택은 반들반들 닳은 나무 대문이 인상적이었다. 대문과 마당 사이 또 다른 문 이 있었는데 양문을 닫으면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생겨 신기했다. 비 오는 날엔 그 좁은 공간에 사촌들과 엉켜 붙어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어른들이 넓은 방에 가서 놀아라 일러도 우린 오래된 나무 냄새와 희뿌연 흙내가 나는 거기가 좋았다.


동갑내기인 사촌 둘과 함께 자랐다. 그 시절 우린 어딜 가든 붙어 다녔다. 셋이 한 몸처럼 뭉쳐 다니며 소소한 말썽을 부리곤 했는데 그런 우리를 고깝게 보는 이가 하나 존재했다. 우리보다 두 살 많은 조카였다. 아버지의 사촌 되는, 나에겐 오촌 오라비의 분의 딸인데 어린 우리에게 고모, 삼촌이라 부르는 걸 불평하곤 했다.


그날은 추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종택에 모인 어른들은 마당과 부엌에서 음식 하느라 여념 없고 어린 우리는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뭐 하고 놀지 궁리했다.

우리를 고모, 삼촌으로 부르길 싫어한 조카는 멀찍이 떨어져 우리를 곁눈질할 뿐이었다.

한데 뭉치면 무서울 게 없던 우리였지만, 나이 많은 조카의 시비가 두려워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대문 안쪽 그 공간에 들어서게 됐다. 우리에겐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곧 우리만의 놀이에 빠졌다. 할아버지를 닮아 손재간이 좋았던 나와 사촌들은 뭔가를 열심히 만들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아도 무언가를 만들어 어른들을 놀라게 할 참이었다. 한껏 집중하느라 예의 그 조카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야! 너네는 너네 집에 가버렷!! 고모는 누가 고모야, 재수 없어!!" 조카가 꽥 지른 소리에 놀라 우리 셋은 얼어붙었다. 영문도 모른 채였다. 그사이 그 조카는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 잠가버렸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흐린 날이었다. 양 문이 꽉 닫힌 공간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겨울 일곱 살 남짓했던 우리가 겁먹기엔 충분한 농도의 어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문에 걸린 빗장을 풀고 나가도 될 일이었는데 어린 우린 그 생각을 못 했다.

남자 사촌 동생이 안쪽 문을 두드리고 뻥뻥 차기 시작했다.

"야!! 너 빨리 문 열어!!! 우리 나가면 가만 안 둔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열어!!!"

악을 쓰며 외쳐도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악을 써대던 동생이 털썩 우리 곁에 주저앉았다. 우린 문안에 갇혀 우리를 가둔 조카를 어떻게 혼내줄지 모의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할아버지였다. 인근에서 둘째가라면 부자인 할아버지가 우리에겐 강력한 뒷배였다.

우린 나무 문의 미세한 틈으로 마당 안쪽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얼굴을 바짝 갖다 대느라 코가 찌그러졌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어른들이 피워 놓은 짚불 연기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솔솔 스며들었다. 순간 식욕이 돋고 배는 르륵댔다.

집 안 어디선가 들리는 웃음소리에 갑자기 울컥, 설움이 솟구쳤다. 우리가 갇힌 줄도 모르고 화기애애한 집안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불안과 설움을 이기지 못한 우리는 결국 합창하듯 울고 말았다.


사건은 아주 시시하게 해결됐다. 동네 슈퍼에 식용유를 사러 나가던 집안 어른이

"누가 문을 걸러놨노." 하시며 빗장을 풀며 우린 발견되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구분되지 않는 액체로 범벅된 우리를 달래느라 온 집안 어른이 출동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는 중에도 소상히 알렸다. 그리고 조카는 목덜미가 잡혀 끌려왔다.


고모 둘과 삼촌 한 명을 가둔 조카는 어른들께 돌아가며 혼났다. 대문이 잠겨있었기 망정이지 열린 채였다면 어쩔뻔했냐고 종택의 최고 어른이 노발대발하셨다. 우리는 몰랐지만 당시 어린아이를 유괴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었다. 갇힌 게 천운이었던 셈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달려온 할아버지는 조카를 혼내지 않으셨다. 대신 우리를 불러 할아버지가 아껴 드시는 박하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셨다. 달콤하고 화한, 새하얀 사탕을 입에 넣어 주고 할아버진 우리 셋을 한꺼번에 껴안으셨다.

"마이 놀랬재? 개안타. 안 다치고 나쁜 일 안 당했으니 개안타. 놀란 거는 시간 지나면 개안아진다. 느그 조카는 할배가 나중에 혼꾸녕을 내주꾸나."

포마드 기름으로 멋스럽게 머리를 넘긴 할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났다. 소나무 같기도, 큰 바위 같기도, 너른 뜰 같기도 한 할아버지 냄새가 우리를 감싸니 벌렁거리던 심장이 제 자리를 찾았다.


그날 이후 조카는 우리를 더욱 피해 다녔다. 같잖은 자존심에 절대 고모, 삼촌이라 부르지 않을 거라 바락바락 우겨대면서.

하지만 우리에게 그날은 무서운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너른 품에서 먹은 박하사탕의 화하고 달콤함, 포마드 향이 섞인 할아버지 냄새, 우리를 다독이며 웃으시던 따사로운 미소로 남아 지금도 나를, 우리를 지키는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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