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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Jan 12. 2024

귀 가려워 죽으려다 간신히 살아난 너에게

주어진 글감대로 글을 쓰지 않았다. 지금 놓치면 생각나지 않을 게 분명한 단상을 잃을까 내 감정과 기억을 따랐다.

아침에 눈 뜨면 습관적으로 챙겨 읽는 글감. 나를 사로잡으려는 잠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제격이다. 글감대로 쓰진 않지만 읽다 보면 번뜩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나를 자극하는 문장들임엔 틀림없다.

오늘의 글감은, 글감 그 자체로 가슴이 뛰었다.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은 주변인을 찾아 편지 쓰기!! 크!! 상상만으로도 흘러넘치는 도파민의 향연! 그렇잖아도 잘근잘근 씹어주고 싶은 인간이 하나 있는데 잘 됐다, 쾌재를 불렀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 숨겨둔 욕쟁이 아줌마를 불러내 아작을 내버려야지!!! 오늘 넌 죽었어!!!!

나는 그이에게 쓸 편지에 '어떻게 네가 나한테?!'라는 문장을 꼭 넣고 싶었다. 그 문장을 따라 쏟아내고 싶은 말을 한가득 담고 자리 잡고 앉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바로 그 순간, '내가 뭐라고? 내가 그이에게 뭔데?'라는 물음이 휙 지나갔다.

맞다. 나는 그이에게 별 의미 없는,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지인, 어쩌면 지인 축에도 못 드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이가 내게 보이는 무례, 싹수없음은 몹시 합당하다 여겨졌다. 의미 없는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으니까, 그이는 몹시 실리적 선택을 한 게 맞다.

그러면 나의 분기는 어디서 비롯됐지? 머물러 생각했다. 1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인스타그램 팔로워 취급 정도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 나를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밀어낸 그이의 행동? 언행 불일치의 위선? 뭐, 이런 거? 나는 그이에게 지인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일진대 그런 대우받는 게 뭐가 문제야? 다시 되물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 내 욕도 아까워 주기 싫은 사람 말이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다가도 참고 마는 누군가는 우리의 짙은 애정이 깃든 사람이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 참는다. 정성 들인 사랑이 없다면 침 한번 뱉고 돌아서면 후련했겠지.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싶다 김 빠진 그이는 내 짙은 애정을 한없이 받은 귀한 사람이었다. 서로가 그랬을 게다.

그이와 내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에 미쳐 건져내 풀지 못한 오해와 서운함이 쌓여 우린 어느새 단물 빠진 껌처럼 뱉어도 그만인 관계로 남았다. 그러니 내 서운함은 주인이 없다. 그저 남은 미련과 약간의 후회가 뭉쳐 마지막 발악을 떨어본 건 아닌지.


아무리 서운해도 욕 한마디 생각나지 않는 고마운 이가 있다. 욕은커녕 '그럴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구나!' 염려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욕 한 바가지도 아까운 이 덕에 알아챈다.

이러니 공자가 그랬겠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내 스승 될 만한 이가 반드시 있다'라고. 애면글면하다 데면데면해진 그이가 오늘 내 스승이었나 보다. 덕분에 귀한 이들이 나를 여전히 애면글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욕 한 바가지는 무용하다. 귀 가려워 죽을 일을 면했으니 그이에게도 잘된 일이다.




* 참여했던 글쓰기 모임에서 받은 글감으로 쓴 글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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