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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Jan 25. 2024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아?

지난해 봄이었다. 딸은 홈스쿨링을 하며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열넷의 딸은 한 커뮤니티에서 매일 8시간가량 공부하고 인증하는 것에 도전했다. 살집이라고는 없는, 야리야리한 딸이라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청춘을 소모하는 듯해 안타까웠다. 그러라고 홈스쿨링하는 게 아닌데, 본질을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말리지는 않았다. 엄마의 어설픈 충고 때문에 딸이 효능감을 잃는 게 더 싫었다. 지치고 힘들면 뭐라 하겠거니 기다렸다. 양질의 음식을 챙겨주고 “엄마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줘.” 당부했다.


딸은 마음이 힘들면 산책 나가자 한다. 그날도 그랬다. 일어나면서부터 시무룩하던 딸이 “산책 가면 안돼?”했다. 안될 리가!! 물을 가득 채워 넣은 물통 하나를 밀어 넣은 크로스 백을 등에 두르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이야기는 겉돌았다.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딸이라 다그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섣부른 추측으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엔 분위기가 몹시 진지했다.

“음… 엄마 있잖아….” 우리가 주로 다니는 산책길의 중반 즈음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옳거니!! 본론이 시작되려 했다!


“나 요즘,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공부가 힘들다는 정도의 고민이겠거니 했던 내 얕은 짐작을 뛰어넘는 고차원적 고민을 딸이 툭 던졌다.


“어떤 뜻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래?” 이럴 땐 되묻는 게 최고다!


“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 딸은 웹툰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난 그 일을 너무 하고 싶거든? 그런데 나한테 그만한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정말 그 일이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 웹툰 작가로 빨리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금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맞나 싶고….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해서 대학 진학하는 게 옳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해. 엄마, 아빠가 큰맘 먹고 홈스쿨링 시켜주는 건데,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송아지 눈을 닮아 선하고 사랑스럽다 했던 딸의 큰 눈에서 눈물이 고이다 뚝 떨어졌다. 내 심장도 뚝! 떨어지려는 걸 재빠르게 주워 담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잠시 추슬렀다. 아동에서 겨우 벗어난 탓에 여전히 가느다란 딸의 손가락을 깍지 껴 잡았다.

“우리 딸이 먼저 알아줬으면 하는 건, 홈스쿨링 하는 걸로 엄마 아빠한테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야. 우린 네가 홈스쿨링을 한다고 뭔가 특별한 결과를 내야 한다거나 특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 결정한 네가 대견하고, 우리는 근처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네가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말이 시작되니 내 심장의 벌렁임은 잦아든 반면 딸의 눈물 보는 제대로 터져버렸다. 아… 방향을 잘못 잡았나? 마주 잡은 손에 땀이 베였다. 그렇다고 방향을 틀기엔 늦었다는 감이 있어 일단 고(go)!


“맞아, 네가 느끼는 감정들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거야. 엄마도 아빠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더 그럴 거라 생각해. 학교에 다녔으면 세상이 정해둔 길로 가기만 하면 될 텐데 넌 네 길을 개척해서 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네가 힘든 건 몹시 당연해.”

위로가 된 걸까? 딸이 귀 기울이는 게 보였다.


“음… 엄마가 살아보니까 말이야. 사람이 자기 꿈을 향해 걸어갈 땐 갈 지자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걷게 되는 것 같아. 특히 네 나이 때는 그 길이 무척이나 넓어서, 마치 10차선 대로 위를 혼자 걷는 느낌이랄까?

길이 넓다는 건 그만큼의 선택지도 많다는 뜻인 반면에 해내야 할 일도 많다는 뜻이야. 그 넓고 긴 길 위에서 큰 갈 지자로 걷는 게 지금 너라고 생각해.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 길이 너무 넓으니 이게 길인지 들판인지 구분도 안되고 앞으로 걷는 건지 뒤로 걷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내 짧은 물음에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가 그 길을, 이리저리 갈 지자로 흔들리면서도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엄마는 생각해. 네가 10차선 도로 위를 흔들리며 걷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이쪽저쪽 길의 벽에 부딪히기도 할 거야. 그래도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어. 그게 힘들다고 멈추는 게 더 큰 문제지. 멈추면 다시 일어서기까지 꽤나 힘들거든.”


“그러면 계속 10차선 도로를 걸어야 하는 거야? 죽을 때까지?” 휴지로 얼굴을 말끔히 닦아낸 딸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아, 산 넘어 산이로다.


“ㅎㅎ 엄마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말이야, 시간이 흐르잖아? 그 시간 속에서 너는 공부하고 자랄 거야. 세상도 알게 될 테고 지혜도 늘어가겠지?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길이 점점 좁아져. 10차선이던 길이 어느 날 문득 8차선, 5차선으로 좁아져 있어. 그때도 물론 갈 지자로 걸을 거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하지만 그간의 경험, 지식, 지혜들이 덜 흔들리게 할 거고 넘어져도 빨리 일어서는 방법을 찾게 할 거니 걱정하지 마.”


“그럼 엄마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어? 몇 차선이야?”


“엄마는 지금 3차선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 여전히 넓긴 하지만 너에 비해 많이 좁아졌지? 나도 10차선 위에 있을 땐 죽을 것 같았어.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고, 앞이 막막했거든. 그렇더라도, 뭐가 되었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계속 궁금해하면서 멈추지 않고 걸었더니 이만큼 좁아졌더라고? 그러니 아마 5년 후 엄마는 2차선 도로를 걷고 있을 거야. 10년 후엔 1차선을 걸을 테고. 하지만 1차선 길 위에서 조차도 흔들릴 거야. 넘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10차 선에 비해 수월하겠지?”

내 물음에 딸이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예전엔 말이야. 엄마도 흔들리지 않고 걷는 게 좋은 줄 알았어. 흔들림 없이 쭈-욱 나아가는 사람을 보면 진심 부럽더라. 그런데 이젠 알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는 걸. 그리고 흔들리는 게 진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란 걸 이젠 잘 알지. 그래서 엄마는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네가 엄청 대견해. 이건 진짜 자기 삶을 살아 본 사람만 가능한 고민이거든. ‘찐’이란 말이지! 이제 열네 살 된 네가 ‘내가 가는 길이 옳은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라고 자신에게 질문한다니!! 엄마가 누군지 딸 하나는 기똥차게 잘~ 키웠네!!!”


기승전 자화자찬이었지만 대화의 끝에 우리 모녀는 개운한 얼굴을 마주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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