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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May 16. 2024

열정이 부족합니다.

홈스쿨링 특별 편

 얼마 전, 모 중소기업에서 스피치를 부탁받았다. 출판사도 운영하는 곳이었고, 그 기업이 보유한 플랫폼에서 몇 년간 독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스피치를 부탁받을 이유가 없었다. 독서를 통한 괄목한 성장을 보인 내가 아니라 고개를 갸웃했다.

 오전에 연락을 받았지만, 오후까지 접촉을 미뤘다. 감정적으로 무엇을 선택하는 게 불편해 마음이 담담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딸이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동안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카페에 도착해서야 담당자와 통화했다.


 독후 활동으로 서평을 쓰고 토론으로 나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론, 제안 등을 삶에서  어떻게 녹여냈고 어떤 발견이 있었는지 나누는 일이라 부담 없이 내 이야기를 했다. 홈스쿨링하는 딸을 두고 있다 보니 딸과의 에피소드가 내 글과 말에 고스란히 녹아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담당자는 나와 딸의 홈스쿨링에 관한 내용을 들려주길 원했다. 홈스쿨이란 특수한 상황을 어떻게 독서와 연관 지어 내용을 구성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담당자의 간곡한 부탁에 일단 준비해 보겠노라 답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아무리 고민해도 막연했다. 간혹 내게 홈스쿨링과 자기주도학습에 관해 궁금해하던 분들의 질문이 떠올랐지만, 독서와 연결시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스피치를 부탁한 출판사 책에 한정지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더해졌다.

게다가 우리의 일상을 기록한 사진이과 영상 자료도 필요하다는 거다. 이런! 사진 찍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내게 그런 기록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내 폰을 가득 채운 건 딸이 원하는 장소에서 딸이 원하는 포즈로 찍은 사진이 전부였고, 딸의 홈스쿨링 과정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도 못 느꼈다. 무척 개인적인 우리 가족의 기록을 공적 자리에 내보이는 것도 불편했다.

그래도 어쩌랴. 초안을 먼저 작성해 달라는 담당자의 부탁에 따라 움직여 대본과 사진 자료를 넘겼다. 이틑 밤을 꼬박 새웠다.



  

지난 5월 15일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열 다서 번째 생일이면서 친정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고 새로이 태어난 지 열여덟 해 되는 날이었다. 올해는 석가모니탄신일과 맞물려 딸이 태어나고 거의 처음이다시피 남편도 쉬는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여느 집과 비슷한 생일 상을 차리지만 우리 집만의 특별한 메뉴가 있다. 바로 딸아이의 첫 돌부터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집에서 직접 만드는 수수경단이다. 전날 밤 반죽을 해 하룻밤 숙성시킨 후 동글동글 빚어 물에 삶아 낸 경단 위에 곱게 갈아 체 친 카스텔라 가루를 묻혀낸 떡은 내가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것과 같았다. 대를 이은 자식 사랑의 증표 같은 것이라 더욱 특별했다.


  알맞게 삶아 건진 경단을 접시에 담아 두고 카스텔라를 갈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스피치를 제안한 기업의 담당자였다. 반갑게 전화를 받은 나와 달리 담당자는 어딘가 어색한 목소리로 버벅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우왕좌왕했다. 처음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행사가 중단되었다는 줄 알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싶던 찰나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내주신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ㅇㅇ님의 열정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희와 함께 하기 힘들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황당스러웠다. 열정이 부족하다고? 떡에 묻힐 카스텔라가루를 만들던 손이 공중에서 일순간 멈췄다. 순간 혈압이 상승했고 뭔가 더 따져 묻고 싶기도 했지만 관뒀다. 따져서 뭣하랴 싶었다. 그들이 결정을 되돌릴 거란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담당자는 단호해 더욱 그랬다.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었던 날이었다. 우리의 행복에 초를 친 그들에게 화가 불쑥 올라왔다. 그리고 억울했다. 내가 스피치를 하겠노라 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잖아도 바쁜 5월에 생각지도 않은 일을 부탁한 건 그들이지 않았나.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지 여러 번 물어봐도 두루뭉술하게 답하던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고 "열정이 부족하다"라고 "평가"하다니!!

  "저희의 기획의도와 맞지 않다 판단되어", "저희가 생각했던 방향성과 달라서, " 등등 많은 거절의 말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한 내 열정을 평가했다. 그 무례에 심장이 벌렁거려 밤새 끓여 진한 맛을 낸 미역국에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후, 남편과 마주 앉아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한테 드라마를 원했나 봐. 그 출판사 책을 읽고 각성 후 크게 바꾼 뭔가가 있을 거라 여긴 것 같은데, 거절하는 말이 정말 기분 나빴어. 열정부족이라니! 너무 무례하고 배려심이 없다 생각되더라고. 전 직원이 책을 많이 읽기로 소문난 곳이고, 출판했던 책에서도 말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말이야. 내 존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언어로 평가질했다는 데 정말 실망스러웠어." 어쩔 수 없이 상기된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렇네. 그렇잖아도 바쁜 사람한테 스피치인지 뭣인지 해달라더니 말이야. 그 사람들이 당신을 담기에 너무 작아 보이네. 아니면 최소한 이런저런 부분을 수정해 달라던지, 방향성을 바꿔달라던지 할 수도 있을 텐데, 모호한 주제 하나 던져주고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이라면 같이 안 하는 게 맞아."



 그들은 내가 정량적 결과치를 보여주길 바랐던 건 아닐까 싶다. 매일 얼마간의 독서를 하며 몇 권의 책을 읽고 변화의 크기와 정도는 어떠했으며 그 결과로 홈스쿨링임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이런 거?

물어볼 걸 그랬나?


  나는 우리의 홈스쿨링이 넘사벽의 무엇이길 원하지 않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위대한 엄마라는 타이틀 따위 필요 없다.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우리 가족은 우리의 홈스쿨링이 누군가에게 '그 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정도였으면 한다. 어느 집이나 시도해 볼 만한 일이길 바란다.

  학교밖 청소년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고백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아이들이 학교 안에 있는 아이들보다 행복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고 편안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설레기까지 한다고 말이다.

  나는 세상에 그런 아이들이 더 많기를 바란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학교에서 시간 때우기를 하기보다 차라리 학교밖에서, 집에서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찾아나가는 청소년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우리의 특별하지 않은, 평안하고 조용한 홈스쿨링이 희망이 되고 도움 되길 온 맘으로 바란다.


  나는 그 기업이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아니고, 내 가치관과 다르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할 수 없다. 나는 강연가도 아니고, 엄마로 코치로 살아내는 일에도 분주하다. 관점과 기대치가 달랐다 하여 내게 열정 부족이란 통보를 하는 그들이 참... 나이스하지 못하다.

 덕분에 나는 나의 시도와 실패 스토리가 하나 늘었다. 다음에 비슷한 기회가 올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대처하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언젠가 나는 이 이야기를 공공연한 곳에서 이 사례를 발표할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또한 우리 가족이 해나가는 홈스쿨링이 어떤 의미인지 정리하게 된 귀한 시간이었다. 거절이 있어 가능한 발견에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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