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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Mar 14. 2024

철학의 맛, 구황작물

어떤 흙을 덮고 있는가

나는 구황작물 러버이다.


고구마, 단호박, 감자, 옥수수 등등. 특히 고구마는 많이 먹을 땐 혼자서 한 해 겨울 동안 100kg를 먹었을 정도다.


이것들을 찌고 굽고 생으로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응용한 음식이나 디저트 가릴 것 없이 구황작물이면 다 좋아한다. 고구마케이크, 감자샌드위치, 단호박샐러드, 옥수수는 그냥 찐 옥수수가 최고 등등.


구황작물을 떠올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맛도 있는데 먹고 나면 속도 든든해서 그런가보다.


구황작물 : 불순한 기상조건에서도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어 흉년(凶年)이 들 때 큰 도움이 되는 작물. (네이버 사전 참고)


구황(救荒)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 옛날에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 이 구황작물들이었다.


기후조건에 영향을 적게 받아야하기에 생육기간도 짧을 뿐더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 배곪는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영양소도 풍부하다. 나의 사랑 고구마로 예를 들자면, 다양한 효능으로 인해 NASA에서도 우주시대 식량으로 선정을 받기도 했다. 고구마는 여러 비타민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한 끼 식사로 아주 손색없다. (자색고구마는 항산화물질인 안토시아닌이 풍부해 노화와 암 예방에도 좋다.)





집에서 고구마 한 박스를 보내주었다. 매 겨울마다 엄마는 친구한테서 5키로씩 구매해 몇 번씩 내게 보내주신다. 엄마 친구가 지은 고구마는 웬만하면 다 튼실하고 맛도 좋다. 밤보다 호박고구마를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 알맞는 속 노오란 호박고구마다.


표면에 묻은 흙을 1차로 잘 털어내고 신문지를 깔고 고구마를 펼쳤다. 고구마는 서늘한 그늘에 통풍이 잘 되게 해놓아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툭툭 털어내는 손길 따라 검붉은 흙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신문지 위로 떨어졌다.


고 놈 참 때깔 좋네.


오늘따라 베란다에 스며 들어오는 햇빛 덕분인지 떨어지는 흙이 반짝거렸다.


척박한 토지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이 흙은 꽤 좋아보인다. 기름이 번들 번들해보이는 게 제법 귀티도 난다.


손바닥 위에 흙을 올려놓고 식품학자라도 된 마냥 요리 저리 굴려보기도 하고 눈 앞에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고구마가 뿌리를 내리고 몸집이 커지는데 도움을 주어서 고마워.


아무리 척박하다지만 흙은 흙일터. 분명 필요한 양분을 고구마에게 주었을 것이다. (물론 엄마친구분은 좋은 터에서 농사 지으셨을 수도 있지만)


다른 작물이었다면 성장하기 어려웠을 환경인데도 구황작물로써 고구마가 잘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목표를 잃지 않아서일까. 이 곳 환경을 수용하고 생명을 뻗어나가야 한다는 목표를.


그 확고한 정체성이 외부 환경을 탓하지 않는 성숙함의 양분이 되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떤 흙에 덮여 있을까? 나를 둘러싼 환경을 미워한다면 이유가 무엇이고, 사랑한다면 어떤 부분 때문일까? 이미 놓여진 상황에서 얻어야 할 양분들을 충분히 얻으며 감사함을 일구어 내고 있을까? 아니면 흙 속에 숨어 척박한 마음으로 눈을 가리고 있을까?


아무리 척박해도 고구마는 잘 자란다. 고구마에겐 그 땅이 비옥하다는 뜻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흙을 털고 세상에 나온 고구마 중 튼실한 놈 몇 개를 골라 깨끗한 물에 씻었다. 그리고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40분 타이머를 맞추었다.


좋아하는 군고구마가 완성되기까지 기다리며 집 정리를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첫 번째 환경은 깔끔하고 정돈된 집.


어느 정도 흘렀을까, 달콤한 군고구마내가 집 안 곳곳에 내려앉았다.


거 참 든든하다.


오늘도 맛있게 먹으며 할 수 있는데까지 철학을 해본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엄마친구분이 이제 고구마 농사를 안하신다는데 앞으론 어디서 시켜 먹어야하지. 으악


고구마! 호박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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