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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Mar 09. 2024

철학의 맛, 꽈배기누텔라생크림

베베 꼬였네

꽈배기는 갓 나온 꽈배기가 우선 진리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먹는 방법이 있다. 맛없없의 조합으로 꽈배기 위에 누텔라를 바르고 생크림까지 듬뿍 찍어먹으면 곧바로 천국행이다.


한 때 이 조합에 빠져 하루가 멀다하고 먹어대다가 살이 찐 적이 있다. 단기간에 이렇게 차곡차곡 살이 찐 건 땅콩 버터가 첫번째, 마요네즈에 오색 뻥튀기를 찍어먹었을 때가 두 번째, 그리고 꽈배기누텔라생크림이 세번째인 것 같다.


먹는 순간 이것들은 나에게 천국을 맛 보여주었고 동시에 살크업이라는 범죄를 선물했다. 징하게 아이러니하다. 죄를 지어야 천국을 맛 볼 수 있다니. 아니지, 사실은 그냥 달콤한 지옥이었을지도.


아무튼 꽈배기누텔라생크림은 나에게 덜렁거리는 지옥, 아니 군살을 선물해주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속에도 꽈배기가 자리 잡고 있던 적이 있었다.







꽈배기는 꼬다가 '-아'를 만나 '꽈'가 되었고, 여기 '그런 물건'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인 '-배기'가 붙어 이름 붙여졌다.


그리고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꽈배기]

1. 밀가루나 찹쌀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엿가락처럼 가늘고 길게 늘여 두 가닥으로 꽈서 기름에 튀겨 낸 과자.

2. 사물을 비꼬아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첫 번째처럼 음식을 말하기도 하지만 두 번째 의미처럼 옛날에는 심사가 뒤틀린 사람을 꽈배기로 비유하기도 했다.


꼬고 꼬아서 말하는 것인데 내 속에는 그것보다도 '꼬아 듣는' 꽈배기가 뱀처럼 주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어차피 그거나 그거나 똑같을지도 모르겠다. 꼬아서 듣기 때문에 말도 꼬아져 나갈 수 밖에.


이 꽈배기는 어린 시절 반죽이 되어 중학교때까지 자리잡고 있었는데 꼬인 걸 풀어내기까지 꽤 힘들었다. 지금 내가 꼬아 듣고 있었구나를 인지하기까지도 몇 년 걸렸다. '저 사람의 말을 꼬아 들어야지' 하고 듣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꼬는 값'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를 떠올리며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


'의자 좀 치워줘.'

=> 너는 거추장 스럽게 왜 의자를 거기다 뒀어? 완전 민폐네. 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같으니.

'A는 엄청 적극적이더라.'

=> 너와는 달리 A는 엄청 적극적이더라. 그래서 난 너보다 A가 훨씬 좋아. 넌 별로야.


이와 같이 누군가 나에게 1을 말하면 1이라고 들리지 않았다. 198번 꼬아 들어버리는 게 내 능력이었다. 당연지사 피해의식이 있었고 때론 그게 날이 선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꽤 서툴고 아픈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인간관계에 목 매달지 않았고 깊게 발을 딛지 않았다. 그러자 꼬아 듣는 꽈배기는 훨씬 잠잠해졌고 얕고 넓은 관계를 가지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자 이미지도 좋아지고 삶이 편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좋아! 인생은 혼자다!'를 외치며 마이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그랬다.


'K야, 내 감정을 듣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울렸다. '아니, 교수님이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감정을 배제하고 말만 쏙 골라 들으라고요?'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감정과 말을 분리할 수 있다고?'하며 가치관이 흔들렸다. (물론 그 때 그 교수님은 화 낼 거 다 낸 다음 뱉으신 자기 합리화이긴 했지만, 그래도 교수님 사랑합니다..)


감정과 말을 분리한다.

상대방이 던진 말의 의미를 그대로 듣는다. 즉 문장 그대로를 받아 들인다.


새로운 개념에 흔들린 뒤로 속에 자리 잡은 꽈배기의 형체가 문득 문득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꽈배기는 상대방의 의도를 내 생각과 감정으로 결론 지은 섣부른 판단이자 확대 해석이었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상대방 말에 필요이상의 감정을 넣어 지레짐작으로 판단하는 것.


문제를 인지한 이후로는 꼬아 듣지 않으려고 부던히 노력했다. 꼬아 들으려는 기미가 보일 때 그냥 꽈배기를 잘라버렸다. 배배 꼬인 생각이 틈 타지 못하도록 싹을 아예 잘라버렸고 위험하다 싶을 땐 생각의 물고를 다른 곳으로 틀고 화제를 전환해버렸다. 그래도 헷갈릴 땐 상대방에게 직접 그 말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당시에는 심리학 서적도 자기계발서도 보편적이지 않을 때라 자문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스스로 방법을 찾아 훈련을 했다.


꼬아 듣는 게 나를 망치는 나쁜 습관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건 꽤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지름길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시간이 흘러 의식적으로 꽈배기를 잘라내고 있을 땐 어떤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내 속의 꽈배기를 전부 버려버린 이후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나도 변했으니 누구나 더 좋은 방향으로 반드시 변할 수 있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한 기대 였다.


꼬아진 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 얼마나 깔끔 담백한가.


'의자 좀 치워줘.'

'이거? 알았어.'

'고마워.'


'A는 엄청 적극적이더라.'

'맞아, 배울 점이더라.'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속에 꽈배기가 있었던 것에도 감사하고 있다. 꽈배기가 없었다면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지 못했을 것이다. 꽈배기를 버리는 과정을 겪으며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꽈배기에 누텔라에 생크림을 찍어먹으며 생각한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이 꽈배기를 지금은 이렇게 달콤하게 즐길 수 있다니, 음! 좋아 조금 더 성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달콤한 지옥에 너무 빠져들진 말자.


살 빼는 건 귀찮으니까...



*얘넨 꽈배기는 아니지만 왠지 내 속에 있던 꽈배기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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