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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Oct 08. 2020

로마인 이야기 2권

저자 : 시오노 나나미, 옮긴이 : 김석희

로마인 이야기 2권은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한니발 전쟁에 대한 역사와 마지막에 그리스계의 최강국 중 하나였고 인도까지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와 당시 절대 최강 해상국이었던 카르타고의 멸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기원전 264년에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하고서야 끝나게 되는데, 그 기나긴 로마와 주변 강대국 간의 전쟁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신생국 로마에 바로 코 밑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의 폴리스 국가인 메시니로부터 원병 요청이 날아들고 이들의 원병 요청에 따라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가 시칠리아의 전쟁에 뛰어들면서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기 전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별 영토를 참고하자.

 시칠리아 진출한 로마군은 최초 메시나가 원병을 요청한 시라쿠사와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를 얻게 되는데, 이로써 당시 지중해 패권국이던 카르타고와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고 양국간 긴장을 고조시키게 된다. 이제 마침내 실제적인 1차 포에니 전쟁 -페니키아인과의 전쟁 - 이 시작된다. 해군력에서 월등히 앞섰던 카르타고이지만, 자신들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서 전쟁의 분위기를 바꿀 줄 아는 로마의 창의적인 함선 개조와 그것을 십분 활용한 해전에서 로마가 승리하고, 시칠리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내의 카르타고 일부 지역까지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아울러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를 대상으로 다섯가지의 요구 조건을 내세운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1차 포에니 전쟁은 막을 내린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부터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마에 있었던 몇가지 사건들이나 시대 상황을 간략히 살펴 보면 우선, 그들은 그리스의 선진화 된 문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귀족의 자제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언어 철학을 배우는 열풍이 일어나게 된다. 카르타고로 부터 빼앗은 시칠리아를 속주(프로빈키아) 로 삼는 결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맹국인 메시나와 시라쿠사 는 여타 시칠리아의 카르타고 지배하에 있던 폴리스 국가와는 차별된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 반도 서쪽 아드리아 해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해적이 대부분이었던 알리리아인 들을 제압함으로써 이것 또한 가능하게 된다. 남쪽의 안정화와는 달리 북쪽은 갈리아인의 위협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기원전 225년 갈리아인은 북쪽 국경을 넘어 남하하면서 로마와 부딪히게 되는데, 이들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집정관 레굴루스가 사망하기도 하지만 전투의 결과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기원전 223년 에는 로마군인 포강을 건너 갈리아인의 거주지역에 쳐들어가 그들을 평정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과감한 제도 개혁도 단행하는데 로마 왕국 6대 왕 세르비우스 때 제정된 군제를 무려 300년 동안 유지하다가 마침내 기원전 241년 새로운 군제로 개편하게 된다. 로마 군단의 조직과 병사의 구성 등도 변화된 로마의 위상에 맞게 재정비 된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정치적인 내적 분쟁이 있긴 했지만 로마에 대한 설욕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에스파냐 지역에서의 지배력 강화와 영토 확장에 공을 들였다. 이러한 반전을 위해 애썼던 사람 중의 하나가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였고 그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 하스드루발이 살해 되면서 마침내 26살의 젊은 한니발이 에스파냐 지역의 총독이 된다. 총독이 된 한니발은 에스파냐 지역의 여러 국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 영향력과 명성을 얻게 된다. 서서히 조국 카르타고와 아버지에게 패배의 수치를 안겨준 로마에게 복수하려는 그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218년 5월 29세의 전쟁 영웅, 최고의 전략가 인 한니발은 로마와의 2차 포에니 전쟁을 위해 카르타헤나를 떠난다. 당시의 지중해 주변 국가의 영토는 아래의 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9년~기원전201년)


동서남 쪽의 방어선이 매우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한니발은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가 설마했던 북쪽의 알프스를 신속하게 넘어 로마의 국경을 통과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알프스의 험한 지형에서 가축을 키우는 갈리아인의 도움을 받으면 말이나 전투용 코끼리 마저도 알프스를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이 계획은 적중했다.당연히 얼마간의 병력이나 기마 등의 전력 손실이 있긴 했지만 이 또한 한니발의 계산 속에 있었고 관리 가능했던 것 같다.

한편, 그 때까지도 로마에서는 한니발이 설마 이탈리아 반도를 직접 공격하리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다.

국경을 넘은 한니발의 군대는기원전 218년 티치노에서 로마군과 첫 전투를 감행한다. 한니발의 승리. 그리고 같은 해 트레비아 전투와 기원전 217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 까지 내려온 한니발과의 3회전이었던 트라시메노 전투에서도 한니발의 화려한 전술과 전장에서의 유연한 변칙 작전 등으로 로마군은 패배하게 된다. 기원전 216년 마침내 2차 포에니 전쟁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전투인 칸나에 회전이 벌어진다. 로마군 8만 7천명 한니발 군 5만명 모두 13만 7천병이 맞붙은 전면 전에서 로마군은 여지없이 패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한니발에게 뺴앗기게 된다. 이렇듯 포에니 전쟁의 초기에 로마는 한니발에게 기선을 제압 당한채 힘들어 하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중기로 들어선 기원전 215년 부터 이탈리아 반도 내의 전투의 양상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 뿐만 아니라 속주였던 시라쿠사 의 왕권이 교체 되면서 로마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 카푸아에 본대를 주둔하고 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한니발이었지만 본국으로 부터의 보급이 불충분한 상황이 그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본국에서 몇차례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번번히 로마 해군에게 막혀 회황하거나 나포당하게 되었다. 로마의 해군은 아직 건재했던 것이다.

로마군은 한니발을 막기위해 3개의 군단으로 한니발의 본진이 있는 카푸아 주변을 에워싸는 방식으로 방어망을 치고 집정관 파비우스의 작전에 따라 지공전을 펼치면서 상대방의 힘을 빼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에는 그라쿠스 사령관의 2개 군단이 파견되었으며 에스파냐 지역에는 코르넬리우스 형제의 2개 군단이 한니발의 동생들과 대치하며 그들로 부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다. 강한 적을 앞에 두고 천천히 조금씩 약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지공전은 느리지만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항구가 필요했던 한니발은 장화 뒷꿈치에 있는 도시 티란토를 공격하게 되고 어렵사리 차지하게 된다. 티란토 점령으로 많은 것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한니발의 기대와는 달리 본국의 보급 지원이나 마케도니아의 지원, 에스파냐로 부터의 보급 지원은 여전히 이루어 지지 못했다.

기원전 211년 반기를 들었던 시라쿠사가 사령관 마르켈루스에 의해 함락당한다. 동시에 한니발이 없는 카푸아에 대한 로마군의 공격이 감행된다. 티란토에 있던 한니발은 이 소식을 듣고 전략적 요충지인 카푸아를 구하기 위해 로마를 습격하여 로마군의 시선을 돌리려했지만 이러한 그의 작전도 실패하게 되고 카푸아도 함락당한다. 이제 한니발은 다시 남부 티란토로 내려가게 된다. 한편 기원전 211년 국내의 좋은 소식과 달리 그간 에스파냐 전선에서 선전하던 코르넬리우스 형제의 2개 군단은 오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과 피로의 누적 등으로 고전하던 중 새롭게 조직된 카르타고의 3개 군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무너진 에스파냐 전선을 복구하기 위해 로마는 사령관 클라디우스 네로를 보내게 되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에스파냐 전선에서의 우위를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유능한 사령관을 계속 원거리에 두기에는 본토의 상황이 여전히 녹녹하지 않았기에 원로원은 차기 사령관을 물색하게 된다. 이 때 지원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24세의 스키피오 라는 청년이었다.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이 청년을 에스파냐 전선의 사령과으로 임명하지만, 노장 실레누스 를 부사령관으로 따라가게 한다. 스키피오 라는 또 한 명의 천재 전술가이자 전략가 가 마침내 세상에 나타남으로써 포에니 전쟁의 후반부는 급작스럽게 로마 쪽으로 승기가 기울게 된다.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지 9년이 흘렀고 전세는 조금씩 로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다고는 하지만 한니발은 여전히 로마의 영토 내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국내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스키피오가 있던 에스파냐 전선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고향이나 다름 없고, 포에니 전쟁의 출발지였던 카르타헤나를 공격하게 된다.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게 된다. 국내 전장에서도 타란토가 다시 로마에 의해 수복되었다.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의 군단은 바이쿨라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고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패배는 적잖은 충격을 본국에 주게 된다. 바이쿨라 전투에서 패배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은 한니발과 연합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게 된다. 물론 동생이 온다는 소식에 한니발이 북상하지만 그 사이에 로마군 사령관 네로의 군대와 하스드루발의 군대가 메타우로에서 맞붙게 되고 여기서 하스드루발은 전사하게 된다

동생을 만나기도 전에 그가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된 한니발은 다시 남쪽으로 회군하게 된다. 기원전 206년 에스파냐의 카르타고 군은 총력을 다해 스키피오와의 일전을 치르고자 했다. 카르타고군 총사령관 시스코네와 그의 군대 7만 4천명, 스키피오의 로마 군단 4만 8천명이 일리파에서 전투를 하게 된다. 코끼리 등의 우세한 저력을 앞세운 카르타고 군의 공격에 신출귀몰한 작전과 보병의 진형 변화, 적절한 기병의 지원 그리고 근접전에 강한 에스파냐의 칼로 무장한 로마군과 스키피오의 대응은 매우 적절했고 결국 승리는 로마군이 차지하게 된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후기는 완전히 로마에게로 그 전세가 기울어진다.


포에니 전쟁 말기에 접어든 기원전 205년, 로마의 젊은 영웅 스키피오는 최연소 집정관을 요청하게 되는데 당시 원로원에서 조차 최고 권력자였던 집정관 파비우스는 집정관이 되어 직접 아프리카 카르타고를 공격하려는 스키피오를 막아섰다. 대신 그를 시칠리아로 보내면선 2개 군단을 그에게 지휘토록 한다. 아직 한니발이 이탈리아 영토에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고 만일의 경우, 스키피오의 능력이 로마에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그는 즉시 아프리카 진군을 준비하며 북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들을 끊임없이 수집한다. 기원전 204 년 스키피오의 군단은 아프리카에 상륙하고 누마디아에서 쫓겨난 왕자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마시니사를 만나게 된다. 마시니사의 기병이 합세한 스키피오 군단은 누미디아 군과의 첫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후에 카르타고, 누미디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도 쉽게 승리 한 후에 카르타고와 7가지 조건의 강화 조약을 맺게 되면서 포에니 전쟁 전반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시작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카르타고는 전쟁의 신 한니발의 귀국을 종용하게 되고 그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하드루메툼으로 귀국한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이 두명의 천제 전략가 들이 마침내 카르타고의 영토인 자마 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그 때가 기원전 202년 가을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병의 우위와 그 기동성을 중시하는 한니발이 기존 로마의 보병 위주의 군 편성을 했다는 것과 오히려 스키피오 군단이 이전 한니발의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스키피오는 그의 전략 스승이었던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변칙적인 보병 편성을 통해 승리하게 되며, 이 전투 이후 한니발은 급격히 그 위세가 꺽이게 되고, 카르타고는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10 가지 항목의 강화 조약을 로마와 맺게 된다. 기원전 201년 길고 길었던 16년 간의 포에니 전쟁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누스" 라는 존칭을 안겨 주면서 끝이나게 된다.




포에니 전쟁 이후(기원전 200년~기원전 146년)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 등의 주변국을 관리하기 시작하고 집정관급 원로원을 특사로 파견한다. 이즈음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내 여타 폴리스 국가에 대한 무력 행사를 하려 하자 로마는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고 기원전 197년 마케도니아와 티노체팔라에서 군사 충돌을 하게 된다. 결과는 로마와 그리스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결국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요구 조건이 담긴 강화 조약을 맺게된다. 그리고 로마는 그리스 동맹국과 약속한대로 2년 후 완전 철수한다. 대신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로마 병사 중 그리스로 팔려간 이들을 데리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기원전 190년 시리아와의 전투가 벌어진다. 동맹국인 그리스 침략을 빌미로 로마는 한니발의 군대를 등에 엎은 시리아와 해전을 갖게 되는데 지상전에서와는 달리 해전에서의 한니발 군대는 로마 해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이로써 에게해에 대한 재해권도 완전히 로마로 넘어가게 되고 시리아는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해전에서의 승리는 병약했지만 외교력까지 갖춘 스키피오의 조력이 있었기에 보다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물론, 강화 조약의 조건에 불복하며 한번 더 교전이 일어나지만 스키피오의 전술을 습득한 로마의 사령관과 그들의 군단앞에서 시리아는 무너지고 만다. 물론 전투 후에는 이전 보다 강력한 6 가지 조건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리 로마인은 알고 있다. 우리는 신들이 주신 것을 실현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따라서 신들이 로마에 준 것이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것은 우리 힘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결과가 좋게 나와도 교만해지지 않고, 나쁘게 나와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로마인의 성향을 입증해 줄 가장 좋은 증언자는 바로 한니발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21세기 패권국이라 자처하는 국가의 지도자나 패권국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필요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두번의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 아드리해 그리고 에게해를 둘러싼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정치 철학은 동맹의 개념이 아니라 "온건한 제국주의" 의 성격으로 변해져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87년 시리아 정복에 성공한 스키피오가 귀국했는데 그를 맞이한 것은 개선식이 아니라 호민관 두명의 고발장이었다. 물론 이들은 당시 최고권력자 였던 스키피오를 끌어내고자 했던 정적 카토의 정치적 음모에 동조했던 것이다. 이들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를 옹호하는 많은 지지자들 덕분에 자신의 명성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리테르노 별장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조용히 지내다가 기원전 183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복한 국가에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 강화 조약을 통해 패권국으로써의 위치만을 유지하려든 스키피오의 온건적 제국주의 가 카토와 같은 정적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케도니아에 새로운 왕 페르세오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시리아와 혼인 관계를 통해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고 군비를 증강해 나갔다. 이후 국경국인 페르가몬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로마는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에 두번째로 상륙하게 된다(기원전 171년). 하지만 로마가 이 문제를 무력이 아니라 외교력으로 풀기위해 노력하는 중에 그리스 일부 국가가 마케도니아에 동조하게 되자, 로마는 기원전 168년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을 그리스로 보내게 된다. 마케도니아와의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노장은 그해 6월 1.5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한 파드나 전투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전술을 복합적으로 활용한 창의적인 전술로 완승을 거두게 된다. 이로써 동맹국임과 동시에 자치국이었던 마케도니아는 멸망하게 된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는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와 카르타고 간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두 국가간의 분쟁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고용한 용병들을 이용해 누미디아를 침략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울러, 이 분쟁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 로마를 방문한 사절단에게 로마원로원은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내륙에 신도시를 건설해서 이주하라는 통첩을 하게 되는데, 이에 반발한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고 마침내 기원전 147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가 이끄는 로마군단과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한니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수차례의 항복 요구에도 카르타고인들은 끝까지 저항하지만 기원전 146년 로마는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카르타고는 함락되고 이후 무자비한 파괴를 통해 카르타고를 역사 속의 도시로 만들어 버린다. 로마왕국이 시작된 기원전 753년 이후 600년 동안 패자에게 늘 너그러웠던 로마는 기원전 146년 한 해 동안 코린트와 카르타고를 말살하는 그들의 역사 이래 한번도 없었던 일을 두번이나 감행하게 된다. 전쟁 이후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인 총독이 다스리는 속주가 된다.

지중해와 에게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로마의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확인하면 된다.

이러한 그리스와 헬레니즘 국가 들의 반복되는 동맹과 조약 파괴 행위와 카르타고의 배신 등을 지켜본 로마의 원로원과 정권 수뇌부는 기존의 온건한 제국주의가 로마에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기원전 146 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엄격한 제국주의 노선으로 변화하게 된다. 


카르타고와 한니발의 느닷없는 침략으로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상황마다 적절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고대 로마인들의 지혜를 보게 된다. 최후 승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작은 전투에서의 승리나 패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로마인들, 승리는 승리일 뿐 그것에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냉정함과 이성적 논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크다 하겠다. 축구에서 그런 말이 있다. "볼품없는 골이든 환상적인 발리골이든 모두 1골이다." 멋진 패배보다는 인내가 가져다 주는 볼품없는 승리에 무게를 둔 결정과 실행 그리고 그에 대한 지지. 우리들 인생사에도 한번 적용해 봄직 하다. 한니발의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천재적 지략 앞에서도 꿎꿎이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버텨냈던 고대 로마의 명장들과 그 군단들을 보며 버텨내는 자가 곧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제대로 버텨냄으로써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내 것으로 만들자는 응원의 함성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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