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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Oct 01. 2020

로마인 이야기 1권

저자 : 시오노 나나미, 옮긴이 : 김석희

책 읽기를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한번 읽는 것으로 만족하는 책도 있지만 책장에 꽂아 두었다가 다시한번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최 愛 책이 한권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그런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로마인 이야기 이다. 로마의 역사를 건국부터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까지를 통사적으로 잘 정리해 놓은 책이고 서양 고대 및 중세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 속의 대 제국 로마에 대한 이야기 이다. 누군가는 삼국지를 통해 중국을 알고, 세상을 알고 정치와 인간사를 안다고 했다. 필자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된 로마인 이야기의 도입인 1권을 간략히 요약해 보는 귀한 시간이 행복하다.


1장 로마의 탄생과 2장 로마의 공화정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먼저, 로마 제국의 태동이 되는 왕정의 로마 왕국과 로마제국의 기초를 놓은 로마 왕국의 일곱 왕에 대한 이야기와 주요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모든 나라들은 자국의 탄생 신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은 환웅이 하늘로 부터 내려와 곰이 사람으로 변한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되고 천제의 아들 환웅의 아들인 단군 왕검 이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고조선이요, 이 나라가 우리 민족의 첫 나라요 단군 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되는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다. 로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에서 트로이가 패배하면서 트로이에서 도망쳐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 온 아이네아이스의 자손인 로물루스 가 건국했다고 믿고 있다. 로물루스는 처음엔 늑대 무리에서 자라다가 양치기들에게 발견되어 쌍둥이 동생인 레무스와 함께 양치기로 성장하게 되고, 자라서는 양치기의 우두머리가 된다. 나중엔 동생 레무스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왕국의 초대 왕이 된다. 기원전 753년 4월에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왕국의 이름을 로마 라고 했는데, 당시의 다른 나라들처럼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다.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어져 있었고 선진국이었던 그리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제 갓 태어난 반도의 중부에 위치란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의 이탈리아 그리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대 세력이 로마를 굳이 자기의 세력권에 넣어야 할 이유나 명분, 매력이 다행히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초대왕 로물루스는 임금된 후에 여타의 임금들이나 권력자들과는 달리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정을 3개 기관으로 나누었는데, 왕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로 권력을 분할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00년 전에 로물루스는 3권 분립을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 만들었다. 또한 왕마저도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민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로물루스는 당시 주변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과 병력 확보 그리고 인구 증가 를 이루었다. 그러나 속국에 대해서도 로마 시민과 동일한 시민권과 원로원 의석도 별도로 배정했다. 이러한 로물루스의 행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 패배 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 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고 했다.

2대 왕은 로물루스와 다른 사비니족의 누마 였다. 그는 로마로 이주해온 종족이었지만 로마원로원의 삼고초려 후에 만장일치로 왕으로써 추대 받았다. 로마의 왕은 당시 최강국 중 하나였던 이집트의 파라오 나 메소포타미아의 왕과 같은 신과 같은 존재나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대표자 정도였다.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선대왕까지 있었던 전쟁을 통한 기초 위에 건전함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누마가 지은 신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쟁의 신이요 출입문의 수호신인 야누스의 신전이다. 전쟁이 있으면 야누스 신전의 문은 열려 있고, 전쟁이 없으면 문은 닫혀 있게 되는데, 로마의 2000년 역사 중에 이 문이 닫힌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백성의 일상에 질서를 위해 달력을 개혁했다, 1년을 12달로 날수를 355일로 정했고, 남은 날은 20년에 한번 결산했다. 또한 누마는 로마가 다신교였던 만큼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계급을 부여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신에게 수호신 정도의 역할을 요구했다.

3대 왕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선출되었다. 툴루스는 왕이 되자 마자 라틴족의 발상지이자 선조의 땅이라 여겻던 알바롱가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로마의 알바롱가 점령은 단순한 이웃 부족의 공략과는 달리 향후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

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는 2대 왕이 었던 누마의 외손자였고 로마 출신이다. 안쿠스도 25년의 치세동안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함을써 영토를 확장했다. 아울러, 테베레 강에 최초로 다리를 놓고, 테베레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 오스티아에는 소금 해변이 있었는데, 당시 화폐로 사용될 정도로 소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 지역의 점령은 로마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가 있다.

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왕이 되기 위해 선거 운동을 했고, 그래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에 대해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전역에서 연설을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라고 했다. 오늘날의 선거와 참 유사하여 실소가 절로 나온다. 그는 왕이되자 자신의 권력확립을 위해 원로원 의석 수를 기존의 100석에서 200석으로 늘렸다. 간척사업에 관심을 갖고 관련사업을 활발히 했고, 평지가 된 지역에 광장이나 공공 건축물을 세우게 되는데, 포로 로마노 는 이 사업에 의해 탄생된 것이었다. 그는 로마의 부의 확대와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정적들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6대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현재까지 로마에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완성한 인물이다. 세르비우스는 군사적인 성공도 이루어 냄으로써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 국가로 우뚝 서게된다. 한편 세르비우스의 최고의 업적은 군제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로마 역사 이래 최초로 인구 조사를 단행한다. 또한 그는 병법을 확립했는데, 당시의 전투에선 별다른 병법없이 그냥 마구잡이식 전투가 일반적이었는데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하여 각기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던 그의 치세도 반대파의 암살에 의한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제7대 왕이자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는 5대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 앞에 "거만한" 이라는 수식어 붙은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선왕인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하고 그를 지지했던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했다. 내정에는 매우 미숙했던 그였지만 군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은 탁월했다. 전투에 나갈 때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가 제거 된 것은 국내에서 벌어진 스캔들이 원인이었다. 그의 아들 섹스투스의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확대되었고 숙적이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왕위를 잃고 로마로부터 추방된다. 이로써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세웠던 로마왕국은 244년의 역사를 끝으로 기원전 509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왕 대신 2명의 집정관이 1년 임기로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 로마로 거듭나게 된다.


2장은 공화정으로 거듭난 로마가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역사를 풀어낸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향후 500년간의 로마 공화정 정치 체제가 시작된다. 공화정은 기존의 왕정에서 1명의 왕이 종신으로 정치 권력을 가지는 것과는 달리 임기 1년의 두명의 집정관이 기존의 왕이 하던 일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물론, 집정관은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선출직이었다. 브루투스는 원로원 의원을 기존 200명에서 300명으로 확대한다. 이는 신흥 귀족 세력의 원로원 참여가 가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집정관 중 한명이었던 브루투스는 왕정 복권을 원했던 일부 귀족 세력과 로마 시민에 의해 쫓겨났던 타르퀴니스를 도왔던 에트루리아 간의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물론, 전투의 결과는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공화정 로마 초기는 왕정 복귀를 원하는 세력과 공화정 로마의 끝없는 전투로 점철된다. 다행히 대부분의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공화정 로마는 그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공화정의 씨를 뿌린 것은 브루투스, 뿌리를 내리게 한 사람은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콜라 였다.

평소에는 두명의 집정관이 서로를 견재하면서 통치를 하지만, 국가가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면 임기 6개월의 독재관을 두어서 위기를 극복하도록 절대 권력을 주었다. 이 때에는 집정관 마저도 독재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공화정 초기 부터 100여 년 동안은 귀족 계급과 평민 게급 간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민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고 그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호민관 제도를 만들게 된다. 호민관은 평민 계급 출신의 대표 2명이 직책을 수행하게 되는데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로마의 계급은 귀족계급, 평민계급, 노예계급을 크게 나뉘어졌다. 귀족 계급(파르토네스)은 로마 왕국 1대 왕 로물루스 때 만든 원로원 100 인의 가문과 이후 원로원 의원이 속한 가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한편 이들로 부터 자신들의 사업에 대해서는 후원과 도움을 받던 클리엔테스 가 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세습되었다. 평민 계급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시민으로써의 권리와 함께 군역의 의무를 지는 계층이다. 평민 계급 중에는 군역을 지지 않는 플로레타리 계층도 있었다. 노예 계급은 자유인이 아니었고, 시민권도 없었다. 

기원전 5세기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공포 기원전 449년)이 만들어지기 까지 로마는 불문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당시의 법률 선진국이었던 그리스로 3명의 시찰단을 1년간 파견하여 배워오도록 한다. 제정된 12표법은 개정의 필요성이 있더라도 개정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하게 되는데, 신법이 제정되면 신법에 어긋나거나 층돌되는 구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공화정 로마가 맞게 되는 최초의 위기는 북방 켈트족의 침략이었다. 로마는 이들과의 전쟁(기원전 390년 테베레 강 전투)에서 참패하게 되고 로마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간신히 그들과의 협상을 통해 켈트족은 철수하게 되고 이후 40년 동안 파괴된 로마의 재건 사업이 이루어 진다. 이 전쟁은 당시 승승장구하던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조국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한편, 비숫한 시기에 그리스(아테네,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 제국에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 폴리스 적인 국가는 단명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도 얻게 된다. 기원전 390년 이후 로마인들은 로마의 재건과 국경 안전 확보 그리고 내부의 가장 큰 문제였던 계급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개혁을 하게 된다. 국가 방위는 당대 최고의 군사령관이었던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다섯번 임명하여 안정화 시켰다. 그는 켈트족과의 전쟁 중 배신한 동맹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면서 로마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고 국경 안전 확보도 이루어 냈다. 과감한 정치 개혁을 감행하여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데, 기존의 12 표법 대신에 리키니우스 법을 제정한다. 임기 1년의 2명의 집정관 제도 확립, 공화국 모든 요직에 평민 출신도 오를 수 있도록 개방, 중요 요직을 거친 사람은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고,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이로써 로마는 귀족 정치가 아닌 명실상부한 과두 정치로써 그 체제가 완전히 변모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로마인들의 의지를 담아 일치, 조화, 융화, 협조의 신전을 뜻하는 콘코르디아 신전을 건립한다.

역사학자 폴리비오스는 이러한 로마의 정치 체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가 아는 정치 체제는 귀족정, 왕정 그리고 민주정이다. 로마인들에게 당신들의 정치 제제는 이 중 무엇인가? 라는 질문한다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
로마의 정치 체제는 이 세가지를 교묘하게 짜맞춘 것이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합의와 결의에 의해 만들어진 공화정 로마의 정치 체제를 도식화 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내정의 정치 체제를 완비한 로마는 외치 즉 동맹국과의 관계도 바꾸었다. 기존의 라틴동맹의 틀을 깨고 로마가 동맹의 중심에 있고 동맹국간의 모든 갈등이나 문제에 관여하여 통제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에서 쉽게 동맹이 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로마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외 관계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패자까지도 동화시키는 생활방식은 바꾸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첫째 요인이라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확신했다.

정치체제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당시의 다른 민족과 달리 도로가 국토의 '동맥' 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무려 2300년 전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 국가를 연결하는 가도(고속도로)를 건설한다. 우리가 잘 아는 비아 살라리아(소금길), 비아 라티나(라티나 가는길), 비아 아피아(아피아 가도) 등등. 그들은 겨우 인마가 지나갈 정도의 길을 확장, 보수, 보완 하는 방법으로 도로 건설을 꾸준히 했다.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인들과 연합국 그리고 향후 식민지 국가에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된다. 시민권을 가진 로마 시민은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졌는가? 동산과 부동산에 대한 권리 보장과 매도와 매수의 권한도 주어졌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법에 따른 재판을 받을 권리,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민회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 끝으로 자유인 신분을 가진 어른이라는 증거 였다. 한편 의무는 16세~40세 까지의 현역 복무와 60세까지 예비역 복무의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민권 역시 매우 개방 되어 있었다. 노예였던 사람도 주인이 자유인으로 놓아 주게 되면 그 자녀들부터는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로마의 동맹국 국민이라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심지어 이중 국적도 허용해 주었다.

켈트족과의 전쟁 이후 두번째로 로마에게 치욕을 안겨준 전투가 있었는데 바로 산악민족인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기원전 316년 치욕을 씻기 위한 2차 전쟁은 기원전 304년 마침내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패자에게 너그럽다는 로마는 당시 전투에서 자신들을 재차 배신한 일부 동맹국에 대해 무자비한 파괴를 감행한다. 이로써 2차 강화 조약을 맺게되는데 삼니움족은 6년 후 다시 로마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기원전 297년 삼니움과의 3차 전쟁은 기원전 270년 삼니움족이 항복함에 따라 로마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게 된다. 아피아가도는 이 전쟁 이후 연장되어 기원전 285년 베누시아 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한 로마는 이제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국가였던 타렌툼을 공격하게 된다. 타렌툼은 병법의 천재라는 그리스 폴리스 중 하나인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불러들이게 되고, 로마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하지만 패배를 통해 끊임없이 교훈을 얻고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로마인들이었기에 결국 피로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고 그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피로스가 사라진 타렌툼은 기원전 273년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타렌툼을 로마 연합의 동맹국으로 만든다. 그러나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자치권을 박탈해 버린다. 이 승리 후에 아피아 가도는 타렌툼까지 연장되는데, 이로써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까지의 아피아 가도는 완성된다. 기원전 270년 마침내 로마는 도시국가를 벗어나 북으로는 루비콘강에서 남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통일국가가 되었다. 로물루스 왕이 로마를 건국한 후 500년의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다.


이책을 쓴 시오노 나나미는 1권의 맺음말에서 이렇게 썼다. 필자도 작가의 소회가 맘에 와 닿았기에 필자의 소회로 대신하고자 한다.

고대 로마인이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은 광대한 제국도 아니고 2천년이 지나도록 서 있는 유적도 아니며,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상대를 포용하여 자신에게 동화 시켜 버린 그들의 개방성이 아닐까. 우리 현대인은 어떠한가. 그로부터 2천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베풀 줄 모르고 통치에서는 능력보다 이념에 얽매이고,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배척하는 일에 여전히 애쓰고 있다. '로마는 아득히 멀다' 라고 말하는 것도 시간적으로 멀다는 뜻 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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