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보다 '짠심'... 딸아이를 응원합니다.
우리나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답게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많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경연 프로그램을 즐겨 보지는 않지만 가끔 화제가 되는 영상은 찾아본다. 가장 최근에 찾아보았던 영상은 <뜨거운 싱어즈> 나문희 편. 그녀가 부른 노래는 '나의 옛날 이야기'였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노년의 여배우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불 꺼진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읊조리듯 잔잔하게 부르는 노래. 영상 속 무대에도, 출연자들의 표정에서도 나의 마음에서도 단순히 감동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감정이 꿈틀거렸다. 회한 같기도 하고 쓸쓸함 같기도 한 그 무엇이.
'나의 옛날 이야기'는 1985년 조덕배가 발표한 곡이고, 2014년에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곡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문희의 '나의 옛날 이야기'는 그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요즘에 가장 많이 듣고 있다. 훗날,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이 노래의 또 다른 매력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르칠 수 없으니 듣기라도
<아이의 피아노 방 - 딸 아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
그런데 꼭 가요만 리메이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내가 즐겨 듣는 피아노곡 두 곡도 여러 연주자의 버전이 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1번과 베토벤 소나타 6번. 모두 여러 연주자가 있는데 내가 선택한 연주는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 소나타와 예프게니 키신의 쇼팽 폴로네이즈이다. 미묘하게 다른 특징이 있는 연주들 사이에서 내 귀를 파고든 곡이다. 적당한 템포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고 할까.
내가 클래식 음악을 선곡하는 기준의 하나는 이거다. 예중 입시를 준비 중인 우리 딸이 현재 치는 곡. 딸이 치는 곡을 여러 연주자의 버전으로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연주를 계속해서 듣는다. 그렇다고 내가 이 곡을 듣고 조언을 해준다거나 곡에 대한 해석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다고 들어보라고 하면, 대부분 자기가 배우는 해석과 좀 다르다며 귀에 익으면 자꾸 그렇게 치게 되니 들려주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오니까.
그래서 단지 선곡할 때만 참고하여 내 취향에 맞게 감상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이 연주자의 연주에 귀가 익고, 딸은 자기의 연주가 완성되어 갈 때쯤 콩쿠르나 평가회에 나가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콩쿠르나 평가회가 끝나고 받은 영상을 접한 후엔 딸의 연주 영상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딸의 연주 영상을 보면 그때까지 듣던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대가들의 연주와 비교할 것은 못 되지만 내 딸의 연주에도 무엇인가 아이만의 특색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같은 곡을 친 또래 전공생들의 연주도 들어보면 딸아이의 연주와 또 다른 점이 느껴진다. 단순히 잘 쳤네, 못 쳤네, 틀렸네가 아니라 신기하게도 저마다 다 다른 연주를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많이 서툰 딸아이의 연주가 가장 좋다. 아마도 연주자를 향한 애정도의 차이일 테지만, 아이의 연주에서 연주 이외의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 팔이 약한 아이다 보니 템포를 올려야 할 때는 팔에 파스를 달고 살고, 옥타브가 많은 곡을 칠 때는 손에 건초염이 오기도 한다. 그러니 내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영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파스 투혼, 얼음팩 투혼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딸에게 '짠심'(짠한 마음)인지 팬심인지 모를 마음이 생길 수밖에.
예중 입시를 앞둔 딸
▲ 피아노를 시작하고 나서 보니 시작해야 할 이유는 딱 한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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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인 내가 아이의 예중 입시를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흘러, 이제 며칠 후면 예중 입시곡이 발표된다. 입시곡이 딸아이와 잘 맞는 곡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입시곡이 발표되면 악보를 읽고, 레슨을 받고 무한 연습을 하게 되겠지. 그러고는 실기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평가회와 콩쿠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과정을 잘 견뎌 통과한다 해도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 앞으로 있을 무수한 관문의 첫 번째 관문에 불과할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할 때마다 힘들어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그뿐인가. 혼자 연습방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자꾸 안쓰럽기만 하다. 얼마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소식에도 피아노 천재에 대한 경외심보다 '얼마나 연습이 힘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생각이 먼저 들었던 나였으니까.
그런데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에 친구들이 놀자고 청하는 모든 연락을 거절하면서도, 피아노가 좋다는 딸을 어찌 말릴 것인가. 그러니 일단 지켜보며 그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자고 마음먹는다. 어찌 되었든 평생에 즐거운 것 하나는 찾았으니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별로 즐거울 일이 없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나의 즐거움을 찾는 일이 꼭 보물찾기 같다. 그래서 딸아이의 즐거움을 응원해 주고 싶다. 노래방에서 방구석 콘서트를 즐기는 사람의 즐거움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즐거움만 못할 리 없고, 방구석 피아노를 즐기는 사람의 즐거움이 연주홀에서 연주하는 이의 즐거움만 못할 리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이제 입시곡이 나오면 그 곡을 찾아 내 취향에 맞는 연주를 질리도록 들어보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내 딸아이의 연주가 완성되는 날, 또 한 번 딸의 연주에 반하면 될 터. 그렇게 마음을 가볍게 하고 앞으로 있을 고단한 일정에 함께 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