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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16. 2024

우리 집은 때아닌 청소 열풍

브라이언 오빠 고마워요

아이가 즐겨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몇 있다. <덩치 서바이벌 먹찌빠>와 <독박투어>를 가장 좋아하는데 최근에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것은 바로 청소광 브라이언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는데, 아이 덕분에 나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유튜브에서 시작됐는데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공중파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무슨 청소를 컨텐츠로 한 방송까지 있냐고 처음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잠깐 스치듯 본다는 게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집을 리모델링한 것도 아니고, 전문 청소 용역업체를 쓴 것도 아닌데 브라이언의 손만 닿으면 엉망이었던 집이 새집으로 역변했다. 특히 그 변화가 돋보이는 곳은 주방과 옷방이었다. 아이는 웬일인지 이 프로그램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우리 집도 저렇게 정리해 보자고 아우성이다.


플라이투 더스카이의 얼굴 마담(?)이었던 브라이언 하면 떠오르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모두들 HOT와 젝스키스, 혹은 지오디에 열광하던 분위기에서 개성 있게도 플라이투 더스카이의 광팬이었다. 그중에서도 브라이언 오빠를 정말 좋아했다. 말끝마다 우리 브라이언오빠가, 하면서 그를 추종하면서 얻은 각종 정보들을 묻지도 않았는데 늘 이야기하는 친구였다. 덕분에 나도 플라이투 더스카이 노래에 조금 관심을 가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잘생기고 영어 잘하는 미국 유학생 출신 발라드 가수 브라이언 오빠가 이렇게나 청소를 잘할 줄은.. 덕분에 우리 집 아이가 청소와 정리에 열광하게 될 줄은.



선뜻 아이 말에 동의해 주긴 했지만 바로 정리 작업에 들어가자고 보챌 줄은 몰랐다. 다음날 하교하자마자 바로 여기저기 서랍장들을 뒤지더니 정리하자고 난리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다.


ADHD 타고난 주증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리를 굉장히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어렸을 적에는 청소이모가 집에 한 번 다녀갈 때마다 애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원하는 장난감과 교구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있어야 하는데 너무 깨끗해졌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떼를 쓰고 뒤집어져서 울어댔다. 당시에는 ADHD 진단도 안 받았던 터라 얘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했다.


왜 깨끗하게 정리만 해놓으면 이 사달이 나는지 원인을 알지 못한 채로 몇 년을 보낸 것이다. 아이는 뭔가를 어지르는 데에는 굉장히 능하지만 정리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도 취미도 없기에 뒤따라 다니면서 정리하는 삶을 살다가 급기야는 집안에서 어느 구역은 방치하면서 살기도 했다. 나중에 뒤늦게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때 아이 행동의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지만.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정리를 하자고 아우성이라니 너 내 자식 맞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거 너무 낯설다. 하루 이틀 잠깐의 변화라도 어디냐 싶어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우선 가장 먼저 정리에 들어간 곳은 바로 책장이다. 그동안 사모은 온갖 학습만화와 전집, 단권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일일이 당근앱에 사진 찍고 올리기도 귀찮지만, 그렇다고 다 종이류에 갖다 버리자니 내 돈 주고 산 새책도 많기도 해서 아까웠다. 그렇게 몇 년간 쌓아둔 책들이지만 막상 아이는 최근 1년간 만지지도 않은 책들도 넘쳐났다.


너무너무 귀찮았지만 단편책들을 한 권씩 다 꺼내서 알라딘앱에 판매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바코드를 찍어가며 하나씩 다 확인했다. 몇 백 원을 일일이 다 체크한 후에 버릴 것, 앞으로 더 보고 싶은 것, 팔아도 되는 것 등을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면서 확인한 후에 구분했다. 의외로 아이는 협조적이었다. 놔두고 더 보고 싶은 책들은 팔지 않기로 하고 나머지 책들은 미련 없이 다 처분에 들어갔다.


놔두면 보지 않을까 싶었던 책들도 다 보내버리기로 했다.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한 책들만 백 권이 넘었다. 아이랑 낑낑대고 들면서 재활용 분류장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다 버렸다. 나머지 사십여 권 책들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 기로하고 따로 정리해 두었다. 책장이 상당히 헐거워졌다. 뭔가 책장이 꽉꽉 차 있어야만 마음이 든든하고 애가 언제라도 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충족시켜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이가 즐겨 읽는 책은 요즘 인기 서적이나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몇 권뿐이다. 이번에 정리하지 못하고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전집이나 단행본도 일 년 넘게 손도 안 댄 책들이 수두룩하다. 찾으면 더 버릴게 많았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자기 방 책장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뒤 만족스러웠는지 아이는 거침없이 주방으로 넘어왔다. 주방은 매일 나의 주요 업무 구역이다. 내 동선에 알맞게 정리한다고 해놨지만 타고난 정리벽도 없고 청소광도 아닌지라 겉만 번지르르하지 서랍 안을 들춰보면 두서가 없다. 아이는 브라이언 아저씨가 방송에서 보여준 것처럼 서랍 하나하나 다 열어가면서 잡동사니들을 다 꺼내놓았다. 언제 사둔지 기억 안나는 청소용품, 유통기한 지난 양념장, 주먹밥 전용 조리도구, 전자제품 안내책자 등이 쏟아져 나왔다.


책방 정리하느라 힘들었는데 부엌은 다음에 하면 안 되냐고 애원해 봤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부엌도 정리에 들어갔다. 약간의 미련이 남아서 쌓아놨던 것들을 다 버리기로 했다.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금방 종량제봉투 하나를 다 채운다. 각 잡고 잘 정리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철 지난 물건들 그때그때 버리는 것 또한 정리능력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한창을 정리하고 나니 주방 서랍장들도 꼭 필요한 것만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와 함께 정리한 구역들을 재차 확인하면서 만족감에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정리와 청소를 질색하던 아이가 맞나 싶다. ADHD 증상은 아이가 가진 타고난 천성 중 하나인데,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혀 adhd아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몇 년간의 약물효과로 좀 나아진 것인지 아니면 방송 프로그램을 본 효과가 강력한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틀간의 반강제 청소와 때아닌 정리로 인해 몸살을 얻었다. 그렇지만 말끝마다 브라이언 아저씨가 했던 것처럼 해볼래, 하면서 보이는 곳마다 정리하려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이거야말로 연예인의 선한 영향력이 아닌가 싶다.


이런 건전한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백 번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매직블록도 모르고 살림하는 여자라고 지인에게 비난을 들었던 나는 청소용품과 적절한 제품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다. 간간이 광고성으로 청소제품도 방송에 나오는데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보고자 한다. ADHD 증상도 이길 만큼 내 아이를 일시적이나마 청소광으로 변화시켜 줘서 감사할 뿐이다.




*사진출처: MBC 청소광 브라이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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