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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ug 11. 2024

그때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 보냈던 방학의 기억


그는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증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았다.
그때의 기억으로 증조모는 살아갔다.

<밝은 밤, 최은영>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중간중간 나오는 내 마음에 사무치게 와닿는 문장들이었다. 극공감 가는 문장들이 자주 나와서, 이 소설에 나오는 문장들을 수집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그중 한 부분을 발췌했다. 백정의 딸이었던 증조모는 일제강점기에 천주교를 믿는 유서 깊은 집안의 아들을 만나 결혼하고 살게 된다. 스물도 안된 어린 증조부가 먼저 적극적으로 증조모에게 같이 살자고, 멀리 도망쳐서 백정의 딸로 살지 말자고 하고 함께 떠나게 되지만 결국 그 삶이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증조부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마음에 든 여자와 도망쳐서 살자는 결정은 다분히 충동이었으며, 평생 풍족한 본가와 가족들을 그리워했고, 아내 때문에 자기 삶이 이렇게 비참해졌다는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래도 증조모는 증조부가 그 시대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천주교도로서 주장하는 인간의 평등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아했고 그때의 기억으로 힘든 결혼생활을 지속해 나갔다는 말이 나온다.


그 문장에 완전히 나는 매료되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살아갔다는 말.

나도 그러지 아니한가. 나도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흔히 함께 살 맞대고 사는 부부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고 애정이고 다 떨어지고 남의 편이라는 말이 고민 없이 나올 정도로 그냥 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애 낳고 육아와 살림에 지쳐 살다 보면 서로에 대한 설렘과 하루라도 안 보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래도 그 남자와, 그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건 결혼 전에 달콤했던 사랑의 마음, 그때의 설레었던 추억이 결혼생활을 지탱해주게 해주지 않을까. 다들 그 추억으로 살아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남편과 설레었던 연애 초반의 그 몽글몽글한 기억은 나에게 강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그렇게 만났지 하는 정도다.


지금의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기억은 남편이 되기 전 남자 친구와의 달콤했던 시간이라기보다 그보다 훨씬 어렸던 초등학생 나이 때 할머니댁에서 쌓였던 것들이다. 정말 이상하게 내 아이가 나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의 기억이 매우 강하게 뇌리에 남아있던 그 열 살, 열한 살 무렵의 나이가 되고 보니 더 자주 그때가 떠오른다.



특히 여름방학이 된 요즘, 내가 내 아이 나이일 적에 할머니댁에서 보냈던 그 긴 방학의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는데, 자려고 불 끄고 누우면 더 자주 떠오르는 것이다.


내가 초등생이던 시절 엄마, 아빠는 열심히 일했고 늘 바빴고 그리고 자주 싸웠다. 주택에 살다가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서는 신도심 동네로 이사 가면서 은행빚을 많이 졌다는 말을 들었고, 그 부담 때문에 더더욱 치열하게 살아갔던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딱히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도 않고, 나에게 온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아줄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이제야 부모님의 그 시간들도 이해는 가지만, 나는 나대로 늘 엄마가 그리웠고 나는 뒷전인 것 같아 서운한 마음도 많이 들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짐을 싸서 할머니댁으로 가는 게 그 시절 정해진 약속 같은 것이었다. 내가 할머니댁에 가는 걸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때는 그냥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별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냥 학교 다니며 일상을 살아가던 학기 중의 기억보다, 할머니댁에서 보낸 방학 때가 지금 뇌리에 강하게 남은 걸 보면 결과적으로 할머니댁에 나를 보낸 게 더 나은 결정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집에 있어봤자, 엄마는 늘 일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나이차이 많이 나는 오빠는 학원 다니느라 바쁘고 어차피 나는 혼자였을 것이다.


할머니댁의 풍경은 지금도 내 눈앞에 선하다. 너른 마당 한쪽에는 볏단이 높다랗게 쌓여있고 가운데에는 기다란 화단이 있었다. 마루 앞에는 그 당시 와상이라고 부르던 곳에 이런저런 살림이 놓여있었고 마당 오른쪽에는 할아버지를 유난히 잘 따르는 개가 살았고 그 앞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무화과나무 밑에는 으레 뱀이 산다고 해서 나는 늘 뱀이 언제든 똬리를 틀고 있다가 마당으로 나올까 봐 겁이 났다.


마당을 조금 내려오면 상당히 넓은 텃밭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돼지를 기르는 막사도 있었고 옆에는 커다란 앵두나무도 있었다. 한쪽에는 장독대가 수십 개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 물이 나오는 수도관이 있어서 빨래도 하고 간단히 씻기도 하고 야채나 과일을 다듬기도 했다. 할머니가 하는 빨래가 너무 해보고 싶어서 늘 나도 하고 싶다고 졸랐지만, 할머니는 자주 시켜주지 않았다. 어차피 시집가면 많이 할 건데 뭘 미리 하느냐고 하면서도 내가 조르면 한두 번은 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매일의 농사일이 끝나는 늦은 오후가 되면 전빵에 가서 막걸리 두 병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 심부름이 싫었지만 가끔 내가 좋아하는 과자나 간식을 살 수도 있어서 그냥 참고했다. 할아버지는 집에 있는 김치나 밑반찬을 안주 삼아 막거리를 그릇에 따라서 드셨다. 두 병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세 병 네 병 넘어가면서 과음하는 날이면 주정을 심하게 부리곤 했다. 주정의 대상은 할머니였다.


이 모든 게 다 할머니 탓이라며 남 탓을 심하게 하기도 했고, 괜히 많은 자식들 중 한 명을 트집 잡아서 자식 욕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했다. 그 자식 중에는 우리 엄마, 아빠도 가끔 등장했다. 할머니는 별 말없이 듣기만 하셨다. 한 번도 대든 적이 없었다. 저 양반 또 난리네, 하는 정도였다. 주정이 심해지면 일본 애국가를 부르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학교에서 배웠던 일본어를 막 남발하셨다. 나를 붙잡고 간단한 일본어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그 많은 손자, 손녀들 중에 나를 가장 좋아했다. 손녀딸인 나를 가장 좋아했다는 사실은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시골 지역에 사는 어른 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손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자주 할아버지 댁에 오고 한 번 오면 길게 있다 가니까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가끔 작은 아빠들도 그런 할아버지를 은근히 비난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모든 자식과 손주들 통틀어서 나를 가장 좋아한다면서, 우리네한테도 그렇게 정을 주지 그랬냐고 웃으며 일침을 가하는 삼촌을 본 적이 있다.


여름 방학 내내 할머니댁에 있으면 학원에 다닐 필요도 없고 그야말로 늘어져있었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농사일 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돕기도 하고 수박 나르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수박을 깨 먹기도 하고 고구마를 캐다가 호미로 잘못 캐서 상하게 만든 적도 많지만 한 번도 그런 나를 혼내지는 않으셨다.


저녁 늦게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붙어 있는 적도 있었고 가끔은 그 시골마을에 사는 또래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어설픈 도시에서 산 탓인지, 그 시골친구들과는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들은 그야말로 야생에서 거침없이 노는 걸 좋아해서 물이 깊은 개울에서 물놀이하는 걸 즐겨했고 구렁이를 잡아서 못살게 구는 놀이를 한다든가 아무튼 겁이 많은 내가 쉽게 할 수 없는 놀이들을 많이 했다. 또래 친구가 동네에 있어서 좋긴 했지만 나와는 잘 안 맞다는 생각을 자주 한 것 같다.


할머니댁에 있는 동안 먹었던 밥상도 자주 생각난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반찬은, 별 볼일 없다고 해도 다 직접 기르고 농사지은 식재료를 가지고 만든 거라 지금 생각하면 참 다 건강식이었다. 주로 나물반찬에 큰 호박을 썰어 넣은 된장국과 물김치를 자주 먹었다. 가끔 특식으로 콩국수를 해주기도 했는데, 지금 어딜 가서 콩국수를 먹어도 그때 집에서 만들어주시던 콩물 맛은 맛보기가 어렵다. 할머니는 두부도, 떡도, 콩물도 다 직접 만들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시골 할머니 밥상이라는 추억으로 아름답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결국 다 할머니의 끝없는 노동에서 나온 것이다. 매일 그 반찬을 다 하고 밥하고 삼시 세끼 해서 먹느라 할머니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그래도 그런 노동에 대해 불평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모든 일을 군말 없이 해내신 것 같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해서 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했으니 그 나이에 할머니가 했던 노동은 지금 내가 하는 거에 비하면 정말 엄청났다.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요리하는 할머니 옆에 자주 붙어 서서 구경하거나 설거지하는 모습도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는 주름지고 볕에 탄 할머니 얼굴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할머니를 더 젊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주름을 펴주고 싶고 얼굴도 뽀얗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제는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도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고 그 시골집도 다 처분하고 없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시골집에 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그때는 그게 호시절이라고 생각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처럼 편안하고 행복했던 때가 없다.


티브이와 라디오도 있었지만 주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나무를 보면서 멍 때렸던 기억이 많다. 아무 생각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기만 했던 순간도 많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그렇게 조용히 지켜본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시골집에 있다 보면 심심해서 한 번씩 책을 찾아 읽기도 했고 시키지도 않은 방학숙제를 챙겨서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자기주도학습이 아닐까 싶다. 아이 방학을 맞아 이런저런 학원을 추가하고 체험수업을 시키고 여행을 다닌다고 한들 그때 내가 누렸던 추억만큼 소중한 기억이 아이에게도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지금은 양가 할머니댁이 다 아파트라서 그런 시골집을 배경으로 놀만한 곳이 없다. 여행을 간다고 해도 리조트라 펜션들이라 그런 시골집 분위기가 나는 곳은 없다.


나 스스로는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이십 년 가까이 지나가버린 요즘에 들어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지금까지의 나를 지탱해온 건 그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 보냈던 시간의 기억들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대놓고 애정표현을 하시던 분들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를 대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빛과 손길에서 나는 충분히 사랑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본격적으로 나도 바빠지면서 그렇게 장시간 할머니댁에 머문 적은 더 이상 없었다. 후에는 간다고 해도 자고 오는 일도 드물었고 당일로 잠시 들렀다 온 게 전부였다. 그래서 방학 때 그 기억이 이토록 강렬하게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그 기억이 참 소중하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때의 기억만큼은 놓치고 싶지가 않다. 추억이라고 칭하기엔 딱히 아름답지도 않고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그냥 '할머니댁에서의 기억'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기억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수록 더 자주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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