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세 번째 날
저 몸짓이 음악에 몸을 실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딱 보아도 하얀은 어떤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이다. 단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정형화된 움직임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요새 다들 낮은음자리표처럼 생긴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는데, 하얀은 선이 있는 하얀색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공연이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아닌 다른 멜로디를 듣고 있다니. 안젤로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둘까 하다가, 하얀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줄이 있는 이어폰은 음소거 기능이 없을 테니 어깨를 살짝 두들겨도 화들짝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얀 무슨 음악 들어요?”
“아, 안젤로 선생님 안녕하세요. 비틀스 노래 듣고 있어요.”
하얀은 버건디 빛 아이팟을 가리켰다.
“The Beatles? And this still works? Your iPod?”
“네, 비틀스 음악. I found my old iPod while cleaning my room. It still works! (방 정리하다가 옛날에 쓰던 아이팟을 찾았어요. 아직도 작동해요!)”
하얀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저도 좋아해요 비틀스. You’re an old soul. Listening to the Beatles on an iPod. (하얀 씨 늙은이 취향이네. 아이팟으로 비틀스 음악을 다 듣고.)”
하얀은 마침 미에게 배운 표현을 쓸 수 있게 되어 기뻤다.
“You know, oldies but goodies? Classics never die? (옛 것이 좋은 것이라 하잖아요. 고전은 죽지 않는다고.)”
“진짜 맞아요.”
“저랑 같이 들으실래요? “
하얀은 물통을 한편에 내려두고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비틀스의 <Oh! Darling>이 흘러나왔다. 오래간만에 듣는 비틀스의 피아노 멜로디와 목소리에 안젤로도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산들거렸다.
“안젤로 선생님 저랑 춤추실래요? Would you dance with me?”
“Dance? (춤추자고?)”
“Yes, it’s a waltz! Just like the Flower Waltz in the Nutcraker. (네, 이거 왈츠잖아요.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꽃의 왈츠처럼요.)”
하얀이 맞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비틀스는 1969년에 왈츠 곡을 만들어낸 거다. 락 밴드로서의 자기들만의 지문을 잔뜩 찍어가면서.
하얀이 내민 손에 안젤로가 손을 건네려다가 말았다.
“No, 하얀. My grandma brought me up better. (안 돼, 하얀. 우리 할머니가 날 어떻게 키우셨는데.)”
당황하는 하얀에게 안젤로는 자기 손을 다시 내밀면서 정중하게 춤을 요청했다.
“She taught me to be a gentleman. Please, would you do me the honor? (할머니께선 나를 신사로 키우셨다고.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It’d be my honor, sir. (얼마든지 기쁘게요.)”
하얀과 안젤로는 그렇게 백색 형광등 아래, 정수기 앞에서 평범하디 평범한 연습복과 일상복 차림으로 비틀스의 음악에 맞추어 왈츠를 췄다.
그 누구도 봐주는 이가 없었지만, 아니 그 어느 관객도 없었기 때문에 더 특별한 춤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아름다움을 좇는 것이 아니라 둘만의 즐거움을 위한 춤이니까.
하얀은 신이 났는지 노래 가사까지 흥얼거렸다. “Oh, darling. Please believe me, I’ll never let you down. (오 달링. 제발 날 믿어줘, 난 절대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무대 위의 하얀도 사랑스러웠지만 이런 일상 속의 하얀은 그 어느 별보다도 빛나 보였다. 안젤로는 관객은 이런 하얀의 진 모습을 보지 못하다니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클라이맥스와 후반부를 지나 노래가 맺음 지어지자 둘은 활짝 웃었다. 다음 곡이 흘러나오는데, 이번에도 왈츠 박자였다. 에타 제임스의 <At Last>.
둘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왈츠를 췄다. 화려한 움직임은 없지만 음악에 모든 것을 줘버렸다. 이번에도 하얀이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하자, 안젤로도 함께 했다.
드디어
내 사랑이 왔어요
내 외로운 나날은 끝났죠
그리고 삶은 마치 노래 같아요
드디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춤이었다.
노래가 막바지를 향하자, 안젤로는 하얀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는 하얀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곡은 끝났지만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던 에타 제임스의 목소리는 이 우주를 빙그르르 빙그르르 돌면서 한 없이 퍼져나가고 있을 것 같았다.
“You’re such a sweet angel. I had forgotten the joy of dancing. Thank you for the waltz. (넌 정말 사랑스러운 천사 같아. 한동안 춤추는 것의 기쁨을 잊고 있었지 뭐야. 같이 왈츠 춰주어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하얀.”
“선생님께서 리허설 때 항상 그러셨잖아요. Have fun, girls! Really enjoy it! (재밌게 해. 정말 즐기면서 해봐!) 춤이 즐거워야 한다는 건 선생님께서 항상 해주시는 이야기인걸요.”
“You’re right. Dance is for joy. (맞아. 춤은 기쁨을 위한 거지.)”
“We should do this more often. Oh, I know what we should do! You should come to the Christmas party that my friend is throwing! You should bring your boyfriend and Snowball too! We can teach them and we can all dance together. (우리 더 자주 이렇게 춤췄으면 좋겠어요. 아 저 좋은 생각났어요! 제 친구가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선생님도 남자 친구랑 스노우볼이랑 같이 오세요! 사람들한테 왈츠 가르쳐주고 다 같이 왈츠 춰요.)”
“하얀, 좋은 생각이예요. Let us bring Vienna to Seoul. (우리가 비엔나를 서울에 소환해버리자)”
작당 모의를 마친 둘은 만개한 포인세티아처럼 활짝 웃었다.
본편에 언급된 곡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세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