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네 번째 날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에서 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추첨으로 선물을 나눠줬는데, 1등 상품은 괌 여행 패키지, 2등은 백화점 상품권 50만 원권, 3등은 스파 이용권 20만 원권이었다. 그런데 내가 덜컥 2등 상품에 당첨된 것이다.
인생에서 이렇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어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한파가 몰아친 날에 집에서 재택근무하지 않고 출근하길 잘했나 싶기도 했지만, 50만 원 상품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니 무얼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성준 씨, 진짜 부럽다. 나는 이 회사 다닌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당첨이 된 적이 없어. 경품으로 뭐 할 거야?”
박 팀장님은 정말 많이 부러워하는 눈치다. 뭔가 사고 싶으신 게 있었나 보다.
“글쎄요, 지금은 그냥 놀라서 별 생각이 없네요.”
“뭐 갖고 싶은 거 없었어? 연말이잖아.”
“글쎄요…”
현금 오십만 원이라면 모를까, 특정 백화점에서만 쓸 수 있는 오십만 원으로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금이라면 생활비에 그냥 보태 썼을 텐데. 박 팀장님께서는 아이디어를 하나 툭 던졌다.
“겨울인데 좀 좋은 외투라던가.”
옆에 있던 인턴까지 끼어들어서 한 마디 보탠다.
“아니면 성준 님, 막스 마라 코트 하나 팍 질러버려요. 나라면 당장 달려가서 지블링 윤기 좔좔 흐르는 캐시미어 코트를 지른다! 요새 다들 막스 마라에서 캐멀색 코트 사던데 나만 없어요 나만. 와, 생각만 해도 행복한데?”
“에이, 그게 얼만 줄 알고. 지금 그 코트 10 프로나 5 프로 할인받아서 사란 소리야. 그리고 나선 카드값 갚으러 회사 다니라고?“
“그 맛에 회사 다니는 거죠. 카드 값이 있어야 억지로라도 출근할 동기 부여가 되죠. 와 진짜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당첨은 내가 됐는데 둘이 더 신났다.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오십만 원으로 뭘 할까. 체스판이랑 체스 피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손에 익어서 아무래도 계속 그걸로 플레이하고 싶을 것 같다. 좋은 스피커? 하늘 높은 줄 모른다고 정말 좋은 스피커를 사려면 오십만 원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았다. 책을 오십만 원어치 사버릴까 하다가 이삿짐 생각을 하면 고개를 다시 절레절레 흔들게 되었다. 결국 딱히 소비, 소유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퇴근 후 백화점에 들러서 안젤로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서 물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뭐 가지고 싶은 것 없을까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십만 원어치를 질러야 하니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보라고 했다.
“You know,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크리스마스에 내가 바라는 건 너뿐이야.)”
안젤로가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따라 하며 말했다.
정말? 정말 가지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I have everything that I could ever wish for. I have you. I have Snowball. Amazing friends. Music. What more could I wish for? (가지고 싶은 건 이미 다 있는 걸? 자기도 있고, 스노우볼도 있고, 멋진 친구들도, 음악도. 뭘 더 바라겠어?)“
이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니 내가 몇 가지를 카메라에 들이대는 수밖에 없다.
알파카 털이 들어가서 복슬복슬하고, 알록달록하니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색의 이 목도리는?
“괜찮아요.“
첫 번째 옵션 실패.
오바마 전 대통령도 들었다는 브랜드의 백팩은? 출근할 때 짐 챙겨가면 어때?
“괜찮아요. Really, I don’t want anything baby. (진짜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두 번째 옵션도 실패.
아무리 매장을 돌고 돌아도 적당해 보이는 물건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난 일단 전화를 끊고 간식이나 먹을까 해서 식품관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이탈리아 토스카나산 레드 와인. 이거라면 어떨까? 안젤로가 태어난 지역의 산물이니 더 의미가 깊지 않을까 생각했다. 평상시에 마시는 가격대의 와인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이고, 상품권으로 사는 건데 뭐. 일상에 마실 것 같은 와인을 스무 병 사는 것보다 한 번 마실 정말 특별한 와인을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자주 마셔봐야 간만 안 좋아지지 뭐. 이왕 간을 무리시킬 것이라면 소중한 추억이 될 와인을 골라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다시 안젤로에게 영상 통화를 걸려고 보니 안젤로가 곧 공연을 보러 들어갈 시간일 것 같아 문자로 대신했다.
- What about a Tuscan wine? Her Royal Highness Duchess of Sussex Meghan Markle’s choice, Tignanello? (토스카나산 와인은 어때? 서식스 공작부인 메간 마클이 좋아한다는 티냐넬로?)
- Oooooo, you know I can’t say no to that. (오오오오, 내가 노라고 못할 줄 알고 노렸지!)
아하. 세 번째 옵션은 성공이다.
- Wine it is, then. (그럼 와인으로 살게.)
자주 마시던 와인의 열 배는 되는 가격이지만 상품권이 오십만 원 치 있다 보니 한 병을 사고도 돈이 남아서 두 병을 살까 고민하던 찰나에 안젤로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 Can we… make it two? If not, no worries at all. (혹시 두 병도 돼? 안 돼도 상관없어.)
- Two bottles of Tig then! (티냐넬로 두 병으로 낙찰.)
- Grazie mille, baby. If it’s a gift to me, would you mind if we bring them to the Christmas party? (정말 고마워 자기. 근데 이거 내 선물이면, 우리 이거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져가도 돼?)
- Your gift, your decision ;) (네 선물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
자기만 누릴 수 있는 선물을 달라고 해도 되는데 또 사람들과 나누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러니 이 사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이 와인 스노우볼이랑은 못 나누겠네. 미안해 스노우볼, 대신 너한텐 맛있는 연어 간식을 선물할게.
좋은 와인이 기분도 좋게 한다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와인으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본편 수록곡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네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