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다섯 번째 날
축구에 목을 맨 사람도 아닌데, 왠지 모로코가 4강 진출을 하니 모로코와 프랑스 사이의 경기는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새벽 네시에 하는 게임이라니,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것도, 그때 일어나는 것도 내 신체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욕심이 나서 재원 씨랑 같이 보고 싶은 마음에 은근슬쩍 힌트를 줘봤는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우리나라 경기도 아니고, 거기다 평일 새벽 네 시에 하는 경기를 어떻게 보냐면서, 숙면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고. 아마 우리나라에서 모로코 대 프랑스 경기를 라이브로 보는 사람 없지 않겠냐고. 좋다고 만나 달라고 할 땐 언제고, 벌써 잠이 더 중요한가 싶어서 조금 토라져버렸다.
혼자지만 그래도 모로코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사명감으로 일어나서 경기를 보았다. 기분은 내야 되니까 무알콜 맥주도 한 병 따고.
언더독, 시적 정의에 홀라당 넘어가는 내 모습을 인정한다. 모로코가 2:0으로 프랑스에게 결승 진출권을 내주어야만 했을 때는 눈물이 나고야 말았다. 진짜 누군가가 보면 프랑스와 대한민국이 경기한 줄 알았을 거다.
오늘 아침엔 열 시까지 출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쓰라린 마음을 안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침실로 돌아갔다. 한 시간 정도를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목이 말라서 부엌으로 나왔다.
“엄마 깜짝이야!”
부엌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식탁에 앉아서 내가 마시다 만 무알콜 맥주병을 매만지고 있었다.
여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이 이상한 옷차림의 여자는 누구며, 우리 집에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이거 에일 맞죠? 맛이 왜 이래요?”
백인인데 한국어 실력이 제법이다.
“누, 누구세요?”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핸드폰을 찾으려고 보니, 핸드폰은 침실에 있다. 여자를 내 눈 밖에서 벗어나게 내버려 두고 침실로 향하긴 불안했다.
“에일 맛이 이상해요. 기다리는 동안 목을 축이려고 했는데.”
여자는 여기서 제일 이상한 것은 자기가 들고 있는 병 속의 음료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누구시냐고요. 여기 제 집인데.”
“제 글 많이 좋아하시죠? 여기 많이 있더라고요.”
여자는 부엌 한편에 위치한 책꽂이에서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이성과 감성>, <설득>을 가리켰다. 뭐야, 지금 자기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거야?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안 그럼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나는 덜덜 떨면서 현관문을 가리켰다. 요새 온갖 신종 사기 방법이 다 생겼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외국인들이 이상한 옷차림으로 가택 침입을 해서 강도질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제가 콜링 카드를 안 가지고 와서, 절 다시 못 만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어디 아프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길 자꾸 하시죠? 나가시라고요.”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들 하는데, 나는 무섭기도 하다.
“제가 그냥 온 게 아니라, 승아 씨가 절 필요로 해서 온 거예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 싶어서 소름이 돋았지만, 우편함에서 편지를 뒤져서 내 이름을 확인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씨, 살다 살다 별 미친 사람을 다 보네. 뭐예요, 무슨 이단이에요? 사기꾼? 신천지? 도를 믿습니다 뭐 이런 거예요? 나가요 나가!”
나는 이 가택 침입꾼을 현관문을 향해 밀어내려고 했다. 모로코의 골키퍼 야신 보노가 혼신을 다 해 골대를 지켜낸 것처럼, 나도 내 집과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근데 여자의 옷의 촉감은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여자의 옷이나 몸을 잡아서 밀 수가 없었다.
“와 나 진짜, 미치겠네. 뭐야 이거.”
나는 이제 무서워서 눈물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꿈인가? 귀신? 아니면 내가 미쳐가기라도 하는 것일까?
“많이 놀라고들 하더라고. 죄송해요. 세월이 하세월이 흘렀는데도, 사람들을 안 놀라게 하는 방법을 아직 못 찾았어요. 저 누군지 승아 씨도 잘 아시잖아요.”
아는데, 말이 돼야 믿지. 이 여자는 내가 보았던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그 모습 그대로다. 레이스가 달린 보넷 사이로 삐져나온 흑갈색 곱슬머리, 가슴 밑까지 허리선을 잡아둔 엠파이어 라인의 하늘색 원피스, 그리고 상대방을 뚫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눈빛.
“집에 차 있어요? 에일 맛이 별로인데, 우리 차라도 한 잔 같이 할까요?”
헛 것인지, 귀신인지, 내 광기인지, 아니면 진짜 제인 오스틴인지 알 길이 없는 것? 사람? 존재. 존재라고 하자. 존재랑 차를 마시게 생겼다. 나는 일단 눈물을 닦았냈다.
“아 그 맥주 무알콜이라서 그래요.”
“오호라, 알코올이 없는 에일도 있다는 말이로군요?”
새로운 정보에 제인 오스틴이라 주장하는 이 존재는 눈을 반짝였다.
“네, 저희 집에 홍차는 립톤 옐로 티 밖에 없는데…”
“알죠, 립톤 옐로 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요즘 잉글랜드 사람들도 귀찮아서 잎차는 잘 안 마시더군요. 많이 마셔봤어요.”
이 짓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 짓을 한 두 번 해본 게 아니다 이거지?
“이미 많이 마셔보셨으면 다른 거 드실래요? 한국산 녹차도 있고, 귤 가향된 녹차도 있고…”
“귤 가향된 녹차 그거 한 번 마셔보죠.”
나를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겠고, 집을 강도질하려 했다면 진작에 털었을 테다. 그러니 이 존재는 진정 나와 차를 한 잔 하려고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동안 찻잔을 골랐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제인 오스틴이지만, 만에 하나 진짜 오스틴이라면 회사에서 받은 머그잔이나 천원샵에서 산 싸구려 컵으로 차를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엄마께서 예전에 결혼 선물이라며 주셨던 샤갈의 회화가 그려진 찻잔을 꺼냈다. 평상시에는 깨 먹을까 봐 좀처럼 꺼내지 않는 것들이다.
차를 우려 ‘존재' 앞에 내놨다.
다과류도 같이 대접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집엔 빅토리안 스폰지 케이크며, 쇼트브레드 쿠키, 스콘 이런 건 없다. 내가 먹다가 다 먹지 못하고 꼭꼭 밀봉해둔 꿀꽈배기를 꺼내서 접시에 수북하게 담았다.
“어머, 다기류도 참 아름답네요. 거기다 처음 마셔보는 차에, 처음 먹어보는 과자네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존재'는 꿀꽈배기를 한 입, 차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도 맛있는 차와 과자가 있네요. 승아 씨 덕분에 새로운 걸 경험해봐요.”
“아, 네…”
더 뭐라고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도 일단 차를 홀짝 마신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뭐 자기한테 연애 상담이라도 하라는 건가?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 수면 부족인지, 놀래서 그런지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난 정말 솔직하게 말했다.
“연애는 참 하는 것도, 쓰는 것도 어려워요. 그렇죠?”
“써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고, 하는 건 어렵네요.”
“제가 이렇게 여러 번 사람들한테 소환돼서 이야기 나눠보니까, 제가 하는 조언 다 소용없더라고요. 그냥 이래라저래라 하는 훈수 두는 귀찮은 목소리만 되고. 그래서 사실 승아 씨께 드릴 조언 같은 건 없어요. 설마 제가 무슨 신데렐라의 요정 대모라도 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
“그럼 저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티타임이요.”
“지금 아침 일곱 시경인데요…”
“차를 마시면 그게 티타임이죠. 시간대가 뭐가 중요한가요.”
이 존재가 지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것이지, 남의 집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오스틴이란
이 존재는 나랑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집 부엌과 거실에 있는 물체들 중 처음 보는 것들을 언급하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저건 뭐냐, 어디에 쓰는 거냐, 어떻게 작동하냐. 정말 연애 소설의 대가가 우리 집에 온 거 맞아? 오스틴을 빙자한 문화인류학자 혼령 아니고?
우려냈던 차가 한 모금만 남은 시점, 오스틴이라는 이 존재는 화젯거리를 바꿨다.
“승아 씨, 전지적 작가 시점 알죠? 제가 그렇게 글 많이 썼잖아요. 근데 그러다 보니 삶에서도 제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안다고 착각하게 되는 때도 있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동기나 바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전 인간을 잘 읽는다고, 글 깨나 쓴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한 말의 의도가 다 전달 안 되는 대도 많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못 읽은 적도 많고요. 원하는 게 있으면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낫더라고요. 그리고 상대방의 의중을 함부로 추정하지 않고요.”
“아무런 훈수 안 둘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훈수 아니고, 제 경험을 나누는 거예요.”
오스틴이라는 여자는 차 마지막 한 모금마저 다 마셔버렸다.
“차랑 다과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해요.”
오스틴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해 보이며 말했다.
“아, 조금 더 드릴까요?”
나는 주전자에 물을 더 끓일까 하여 싱크대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보니 오스틴이라고 주장하던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뭐야, 오는 것도 제 멋대로 오고 가는 것도 제 멋대로 가버린다니. 왔다간 것을 증명할 수 있게 책에 저자 서명이라도 해달라고 했어야 했나.
샤갈의 그림이 그려진 찻잔도, 꿀꽈배기를 가득 담았던 그릇도 텅 비어 있었다.
뭘까, 월드컵 경기를 보느라 수면이 부족했던 걸까? 아직 졸려서 어쩔 줄 없는 걸 보니, 내가 깨어있긴 한 것 같은데. 시간은 아직 일곱 시 반이 안 됐다. 조금 더 눈을 붙여도 될 것 같다. 침실로 돌아가 다시 알람을 확인하고 몸을 누였다.
몸을 수평으로 하기가 무섭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재원 씨의 문자다.
- 굿모닝, 잘 잤어요? 저는 아침에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출근하는 중이에요. 이따 퇴근하고 볼래요?
오스틴이라는 존재의 ‘훈수 아닌' 훈수를 따라본다.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 나 모로코랑 프랑스 경기 보느라 제대로 못 잤지 뭐예요. 지금 좀 더 자려고요. 피곤해도 퇴근하고 재원 씨 보고 싶네,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 어제 눈도 왔는데, 따뜻한 정종에 꼬치 오뎅 콜?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다섯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