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여섯 번째 날
호랑이 장가간다는 날이 며칠 안 남았다. 동지는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고, 달이 오래도록 떠있어서 호랑이 두 마리가 만나 노니기가 좋은 밤이라고 하던데, 동지를 6일 앞둔 요새 낮은 이미 충분히 짧고 밤은 길다. 그래서 어제 승아 씨랑 추위와 분위기에 취해 정종을 잔뜩 마셔버렸다. 밖은 춥고, 안은 따스해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발견했다. 크기는 무진장 크게 만들어 놓고서, 이목구비는 없었다. 이렇게 크게 눈사람을 만들려면 손이 얼마나 시렸을까? 대단한 정성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나뭇가지로 눈사람에게 눈코입과 팔, 그리고 머리엔 뿔을 선사했다. 이러면 반인반루돌프가 되어버리는 것인가. 다음 날도 추울 거라고 하니, 분명 다음 날 아침 내가 출근을 할 때도 눈반인반루돌프가 날 맞이해줄 거라고 믿었다.
지난밤 정종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눈을 뜨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숙취를 달래기 위해 퀸의 <Don’t Stop Me Now>를 틀고 비타민이 가득한 멜로디에 몸을 흔들면서 커피 머신으로 향한다. 레몬 껍질을 벗겨서 트위스트를 만들고 에스프레소에 얹어 먹으면 딱이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동안 레몬도 콱 베어 물어 먹는다. 입 안에서 태양이 폭발한다. 그러고 나서 에스프레소를 딱 마시고 나면 잠이 확 깨어버리는 것이다.
위가 약한 승아 씨는 아침부터 빈 속에 산을 그렇게 들이부으면 어떡하냐며 당장 이 습관을 버리라는데, 아직까진 숙취에 이만한 비방을 찾지 못했다. 아마 이 시간쯤 승아 씨는 애호박과 당근을 종종 썰어 넣은 채소죽을 먹고 있을 것 같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어제 이목구비로 삶이 불어넣어 진 눈반인반루돌프를 볼 생각에 신이 났다. 아침에 등원, 등교하는 아이들도 보고 좋아했겠지?
하지만 아뿔싸, 눈반인반루돌프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놀이터에 아직 눈이 많은데도. 그의 뿔이었던 나뭇가지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도 처참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새하얀 바닥이었건만 내 눈에는 선혈이 낭자해 보였다. <Frosty the Snowman> 노래 속의 눈사람은 태양이 데려가던데. 나의 눈반인반루돌프는 사람이 데려간 모양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산타 할아버지께서 이 잔혹 범죄자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으실 것이 확실하다.
출근해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며 동료들에게 이 얘기를 하자, 동료들은 “그러게 뭐 하러 눈사람 같은 거에 정을 붙여, 끽해봐야 녹아 살아질 건데“라고 말하기도 하고 “요샌 그래서 아예 돌기둥 같은 거에다 눈으로 살을 붙여서 눈사람을 만든대. 눈사람 파괴하려고 발로 차는 사람 발이라도 아프라고 그런대”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나는 내일 누군가가 내 눈사람을 부수더라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사람을 만들 테다. 잠시나마 눈의 정령에게 형상을 입혀줄 수 있는 기회니까. 지난번에 만났던 눈의 정령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니까.
* 사진 속의 눈사람은 작년 초에 제가 직접 만들었던 눈사람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화자가 이목구비만 더해주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눈을 뭉쳐 만들었습니다. 여럿이 보면서 행복해 할 수 있길 바랬는데, 다음 날 놀이터로 되돌아가 보니 나뭇가지 하나만 남았더군요. 함박눈보다 더 펑펑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눈사람은 태양과 온기가 데려갈 때까지 아프게 하지 말고 보기만 해요.
본편 수록곡
엘라 피츠제럴드의 <Frosty the Snowman>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여섯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