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예순여덟에 스케이트를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일곱 번째 날 - 고순호

by 다정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언제나 오늘이 가장 빠른 날이죠. 오늘은 눈이 세상을 새하얀 담요처럼 덮어줬겠다, 그 어느 날보다 새 종이장에 새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좋은 날이예요.


그래서 남편한테 그랬어요, 나도 김연아 씨처럼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다고. 내 나이 예순여덟에 갑자기 뭐 국가 대표가 되어서 동계 올림픽을 나가겠다 이런 비장한 야망이 있는 건 아니예요. 가끔 몸이 많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유튜브에서 김연아 씨의 선수 시절 영상을 보는데, 그러다가 나도 한 번 저렇게 얼음 위에서 스르르 움직여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생각만 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고요.


당연히 알죠, 김연아 씨가 그렇게나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고 우아하게 빙상 위에서 움직이는 건 많디 많은 연습량과 노력 덕분이라는 것. 그래도 김연아 씨가 얼음 위에서 느끼는 공기의 움직임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어요. 바깥에서 맡는 겨울바람과는 또 다른 상쾌함일 것 같아서요.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흔쾌히 가자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이 웬일로 이렇게 안 해보던 것도 해보겠다고 하는지, 내일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예요. 핸드폰 메시지로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모 대학교에 아이스링크가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했어요. 저는 뭐 찾아보고 물어볼 것도 없이 그냥 쫄래쫄래 따라갔죠.


처음 신어보는 스케이트화는 돌덩이도 그런 돌덩이가 없었어요. 신기도 복잡한데, 무게가 정말 놀라웠어요. 이 무거운 걸 신고 돌고, 점프하고 하다니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도대체 얼마나 튼튼한 몸을 지닌 것일까요? 나는 그냥 땅 위에서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멀리 나왔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타봐야지. 그래서 남편이랑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아이스링크로 향했어요.


첫 발을 얼음에 올려두는 것까진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문제는 두 번째 발이었죠. 한 번도 양발을 얼음 위에서 디뎌본 적 없는 제 몸은 경보를 울리기 시작했어요. 저한테 있는지도 몰랐던 온몸의 근육들이 바짝 긴장하고야 말았다니까요. 두피에도 근육이 있는 양, 머리카락까지 쭈뼛 서더라고요.


김연아 씨는 빙판 위를 군림하던데, 저는 아이스링크의 벽을 붙잡고 남편과 엉금엉금, 뒤뚱뒤뚱 걸었어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러면 어때요, 정말 오래간만에 남편이랑 깔깔대며 웃을 수 있었는 걸요.


벽을 붙잡고 아이스 링크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왠지 벽에서 손을 떼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잠시 손을 떼고 빙판 위에 우두커니 서 보았죠. 잔뜩 집중해서 그러고 있는데, 제 옆에서 남편이 따라 하다가, 남편은 와락 하고 빙판에 미끄러진 거예요.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지나가던 아이스하키 선생님께서 붙잡아 주셔서 망정이었죠. 그래도 우리 남편 포기 안 하고 열심히 타더라고요. 집중하는 모습만큼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 같았어요.


빠르게 빙판 위에서 움직이며 사라락 느껴지는 공기를 느껴보지는 못 했지만, 빙판 위에서의 입김만큼은 잔뜩 불어냈어요. 다음번에 다시 오면 그땐 양볼을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이스 링크에는 김연아 씨의 후배가 될 어린 친구들이 많았어요. 요정을 본 적은 없지만 요정 같다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우리나라 피겨 스케이팅계의 미래가 밝을 거란 생각도 들고, 그 어린 친구들이 열심히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 친구들도 분명 첫째 날에는 저처럼 아이스 링크의 벽만 붙잡고 왔다 갔다 했을 거 아니예요? 저렇게 어려운 기술을 구사하려면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겠어요.


그렇게 한 시간도 안 되는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상장을 누볐더니 (스케이트를 탔다고 말하긴 조금 부끄럽네요) 출출해지더라고요. 아이스 링크 로비에는 작은 분식집도 있었어요. 춥디 추운 아이스 링크를 벗어나서 따뜻한 떡볶이와 어묵을 먹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여느 때 먹은 떡볶이나 어묵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어요. 옆에 있는 남편도 오늘 본 중에 가장 흥겨워 보였고요. 우리 둘 다 염불보단 절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예요. 오래간만에 식욕이 붙어서 열심히 먹는 절 보면서 ‘우리 마누라 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사줄게!’라고 호언장담하더라고요. 이 사람 제가 떡볶이 한 열인분 먹으면 어쩌려고 그러죠?


그리고 오늘은 더 스케이트를 타지 못할 것 같아서 아예 스케이트화도 벗었는데, 와.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었어요. 그 무겁던 스케이트화가 발에서 벗겨내 지니까 진짜 구름에도 가서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니까요? 빙상에 있는 것도 즐거웠지만, 사실 스케이트 타는 것의 최대의 묘미는 이렇게 스케이트화를 벗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유인 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우리가 육체를 떠날 때, 그때도 이렇게 스케이트화를 벗는 것처럼 자유롭고 가벼운 느낌일까요? 바람에 흩날리는 들꽃 씨앗처럼 가벼워져 날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훨씬 나중에 알고 싶어요. 아직은 무거운 스케이트화를 신고 얼음 위에서 뒤뚱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거든요.


남편만 괜찮다고 하고, 제 몸도 허락해주면 또 금방 아이스 링크를 찾아갈래요.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일곱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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