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장미의 일요일 소동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여덟 번째 날

by 다정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한테만 얘기해줄게. 비밀이야, 알겠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원래 서양 가톨릭 국가에서는 11월부터 12월 24일까지 금식 기간으로 규정하고, 그 어떤 방종이나 유흥도 허락하지 않았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거룩한 날들이라면서 말이야. 거룩한 건 둘째치고, 가뜩이나 해도 짧아지는데 인간들의 기쁨의 근원이 되는 고기, 와인, 버터 등을 섭취하지 못하니, 다들 몸도 기분도 축 처졌을 만도 하지. 그러니 얼른 크리스마스가 돼서 축제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최대한 짧게 하고 일찍 잠들었다고 하더라고.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달과 부엉이들의 시간이, 마법의 시간이 길어졌다는 거지.


하지만! 그 고달픈 금식 기간동안 딱 하루의 방종이 허가 됐대. 크리스마스가 오기 직전 일요일에. 그 날만큼은 고기도 먹고, 버터로 요리하고, 와인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겨도 됐대. 인간들은 십일월부터 한 달이 넘게 제어 기어를 꽉 붙들고 있다가, 크리스마스 전 마지막 일요일 하루만큼은 기어를 확 풀어버렸다는 거지.


그 일요일을 장미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대. 아, 참고로 장미의 일요일이라는 이름엔 의미심장한 기원이 없어. 그냥 성당 장식이 장밋빛 분홍색인 일요일이라서 장미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더라.


그게 바로 어제였어.


인간이 잠든 시간 동안 우리가 깨어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 그리고 인간들이 방종을 즐기면 즐길수록, 지쳐서 우리 크리스마스 장식들에겐 관심이 덜해져. 눈꺼풀이 무거워질 테니까.


너희가 자유를 즐기다가 자는동안 우리도 기나긴, 자유로운 밤을 즐기는 거야. 매일 오는 밤이 아니라고. 겨울 밤은 마법으로 가득하니까.


우리의 현재 관리인은 윤보미라는 인간이야. 서울 망원동의 골동품 가게에서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여러 장난감과 장식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그중 내가 담겨있는 스노우 글로브를 집은 거지. 끝내주는 눈썰미 하나는 인정해줘야겠지?


난 수년 전에 영국의 모 백화점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기념하여 VIP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어졌어. 눈이 수북하게 쌓여 새하얗게 물든 전나무 숲에 아기 사슴인 나와 아빠 사슴, 그리고 작은 종달새 한 마리가 있는 풍경이지. 보미는 눈이 오지 않는 날이면 우리가 있는 스노우 글로브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눈이 폴폴 나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해.


보미는 술을 자주 마시지 않더라고. 그래서 사실 무척이나 걱정했어. 장미의 일요일 전후엔 인간들이 술에 가득 취해줘야 우리가 스노우 글로브 밖에 나와있는 모습을 혹여나 보더라도 술김에 헛것을 봤다고 생각해주니까. 그래서 우린 관리인이 가능하면 장미의 일요일 전후에 음주를 좀 해주는 걸 선호해. 근데 보미는 우리를 할로윈 직후에 데려와놓고선, 12월이 되도록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는 거야. 이번 장미의 일요일에 우리만의 축제를 벌이긴 글러먹었나 싶어서 조마조마했어.


알고 보니 보미는 책임감 때문에 술을 잘 마시고 있지 않은 거 더라고. 해야 할 일도, 챙겨야 할 사람도 많아 보였어.


근데 친구 미가 겨울이고 동지가 다가오니 카페 특선 메뉴를 해보자며 아주 요상한 것을 내놨지. 글쎄 단팥죽에 버번위스키를 들이부었지 뭐야. 원래 부엌일은 미보다는 보미가 잘하는 편이거든. 부엌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한 것인가 했어.


보미도 “야, 너 일자리에서 술 마시고 이상한 생각해낸 거 아니지? 요새 너무 추워서 헤까닥 해버린 거야? 단팥죽에 위스키라니 무슨 짓이야” 라며 미가 만들어낸 이상하디 이상한 음식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거봐, 내가 먼저 얘기했지? 단팥죽에 버번위스키라니 이상한 조합이라고. 내가 스노우 글로브 속 은색 아기 사슴이라고 무시하지 마. 나도 이 안에서 볼 것, 안 볼 것 오랫동안 많이 봤다고. 어쩌면 너보다 오래 살았을 수도 있고, 너보다 많은 걸 봤을 수도 있어. 여기 반도 사람들이 그런 말 많이 하더라,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내가 스노우 글로브 속 아기 사슴 노릇만 지금 사십 년을 가까이했어. 야생에서 나만큼 나이 많은 사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여하튼 와인에다가 과일에 향신료에 설탕 넣고 끓이는 사람, 설탕 범벅에 건과일 넣고 슈톨렌인지 뭔지 독일식 과자 만드는 사람 별의별 사람을 봤어도 단팥죽에 위스키 넣는다는 사람은 못 봤다, 이 말씀이지.


보미가 이상할 거라고 해도 미는 한사코 단팥죽을 보미에게 권했어. 시나몬 가루까지 내밀면서 원하면 시나몬 가루도 첨가하라고 하더라? 참내, 쿠키 몇 번 구워보더니 자기가 무슨 마스터 셰프라도 되었다고 착각하는 건지.


근데 하도 미가 종용하니까, 보미도 어쩔 수 없이 한 술 뜬 거지. 그런데 웬일, 이 이상하디 이상한 조합이 희한하게도 맛있었던 거야. 그래서 한 술만 먹으려다가 한 그릇을 다 비워버린 거지. 그리고 나선 고삐가 풀려버렸어. 미랑 보미는 이제 동지도 며칠 안 남았으니, 이걸 카페 겨울 메뉴로 올려야 하네, 마네 하다가, 버번의 양을 가감해야 되네 마네 하다가, 버번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 그리고 나선 카페의 소파에 둘 다 곯아떨어져버렸어.


장미의 일요일 밤에 이보다 더 완벽한 시작이 있을까?


자정이 되자 스노우 글로브의 유리벽은 녹아 사라졌어. 나랑 아빠는 몸에 들러붙은 가짜 눈송이부터 털어냈어. 보미는 이 눈송이들을 보는 걸 좋아라 하지만, 이게 등짝에 달라붙어도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우리 입장에선 무척이나 간지럽다고. 보는 눈이 없으면 아주 살짝 몸을 움직여서 눈송이가 떨어지게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면 그러지도 못해.


“아들, 사고는 적당히 치자. 그리고 완전 범죄. 알지? 오케이?”


사실 내 진짜 아빠도 아니면서 아빠 사슴은 이렇게 항상 날 아들이라고 부른다니까. 인간들의 가부장제를 그대로 답습하다니 우습지만 나도 그냥 장단 맞춰줘. “네, 아부지" 하고 답하는 거지.


“종달새 아저씨, 아저씨는 이번 장미의 일요일엔 뭐 하실 거예요?”


“아니 하도 오래 안 날고 있었더니 날개 죽지가 다 뻐근하네. 오래간만에 좀 이리저리 날아야지.”


그러더니 아저씨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스노우 글로브 밖으로 날아가버렸어. 난 아저씨처럼 날 수가 없으니 앙금앙금 걸어 나갔지.


“아들,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알지? 해뜨기 전에, 인간들 눈 뜨기 전에 다시 들어와야 되는 거.”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간만에 우리 뿔 씨름이라도 한 번 할까요?”


“뿔도 없는 녀석이 뿔씨름은 무슨.”


“그럼 저 잡아보세요!”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달렸어. 아빠도 쫓아오니까 더 열심히 달렸지. 아무 생각 없이 직진, 직진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부엌이야.


“아들, 스톱, 스톱!”


위험 지역이다 이거지. 우리가 아무리 제멋대로 논다고 해도 인간들이 해놓은 일까지 아수라장이 되게 놀진 않으려고 하거든.


“그럼 우리 뿔씨름해요, 뿔씨름!”


나는 무턱대고 아빠한테 머리를 들이받았어.


“어허, 이 녀석 보게. 아빠한테 덤빈다 이거지!”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했어.


“아이고 우리 아빠도 많이 늙으셨네. 일 년 동안 가만있기만 하셨더니 이제 용 못 쓰시는 거야.”


“이 녀석 봐라, 그 고약한 말버릇 하고는.“


원래 우리 뿔씨름이라는 게 절반은 뿔로 하고 절반은 입으로 하는 거야.


그렇게 아빠랑 뿔씨름을 하다가 내가 발을 헛디뎌서 뒤로 밀려나버렸어. 그러다가 단팥죽이 담긴 그릇과 팍 하고 부딪혀 버렸지. 아 젠장, 근데 단팥죽이 쏟아지고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어.


“무슨 짓 하는 것이여 지금!”


종달새 아저씨가 우릴 향해 날아왔어.


“이제 큰일 났다. 둘 다 갈색 범벅이네. 어휴 난 몰라.”


아니 아저씨는 도와줄 생각도 안 하시고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해. 난 그 와중에도 갑자기 버번위스키가 들어간 단팥죽 맛이 궁금해졌지. 그래서 그걸 핥아먹고 있으니까 아빠가 호들갑을 떨었어.


"아들, 뭐 하는 거야 지금!"


아빠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셨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대책 없이 단팥죽을 먹었는지 모르겠어. 어찌 되었든 간에 소리가 크게 났나 봐. 보미가 잠에서 깨어나더라고.


“미야, 소리 들었어? 뭐 떨어졌나 봐.”


“몰라 난 너무 졸려..”


곤히 자고 있던 보미가 일어났어. 미는 아직 자고 있지만. 아 대사고다, 이건.


“아빠 어떡해요?”


“쉿, 아들, 따라와.”


우린 부엌의 요리 도구들 사이로 몸을 감췄어. 아까 요리하느라 쓰인 국자 같은 것들이 있어서 적당히 은색과 갈색이 뒤섞여 있어서 우리 보호색이 되어주더라고. 이럴 때 보면 아빠 사슴이 아빠 노릇 하지?


보미는 아직 술김이 풍기는 걸음새로 부엌으로 들어왔어.


“뭐야… 이거 너무 가장자리에 뒀었나? 아 귀찮게…”


아직 보미는 실눈이야. 버번위스키를 마셔댔으니 피곤하고 졸리기도 하겠지.


우리가 다 조용히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아니 글쎄 종달새 아저씨가 눈치도 없이 아직도 천장을 배회하며 날아다니는 거야. 푸드덕푸드덕 소리 내면서.


보미는 치워야 할 것들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자꾸 어디선가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나니까 위를 올려다봤어. 종달새 아저씨 딱 걸린 거지.


“뭐야 웬 새가 다 들어왔어? 문 열렸었나?”


그러다 보미랑 종달새 아저씨의 눈이 마주쳤어.


“어? 너는? 스노우 글로브에 은색 종달새?”


그 한 마디에 아저씨가 너무 놀래서 날다가 비행을 멈춰 버린 거야. 그러니 어찌 되었겠어?


톡 떨어졌지.


그거도 보미의 정수리에.


와 보고 있던 아빠랑 나랑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바닥에 나동그라진 종달새 아저씨는 구석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어.


천만 다행히도 보미는 술김에 바로 아저씨를 찾지 못했지.


"와, 나 술 오랜만에 마셨더니 정신이 나갔네 나갔어."


보미는 조금 비틀거리며 엎질러진 단팥죽을 치우는 둥 마는 둥 하고, 단팥죽이 잔뜩 뭍은 조리 도구들을 싱크대에 담갔어. 나랑 아빠 사슴까지 한꺼번에.


갑자기 차가운 물에 입수해서 우리 둘 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보미가 우리를 눈치채면 안 되니까 무조건 숨죽이고 있었지.


보미는 설거지는 다음 날 할 생각인지, 자고 있던 소파로 술렁술렁 걸어 돌아갔어. 보미의 숨소리가 정박으로 들릴 때, 그제서야 나나 아빠나 찬 물 밖으로 나왔지.


"으아,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들. 근데 이참에 단팥죽 다 씻고 나가야 돼."


"추운데 꼭 씻어야 돼요?"


내가 우는 소리하니까, 아빠가 이러셨지.


"그럼, 갈색 단팥죽 흙탕물처럼 잔뜩 묻히고 스노우 글로브 안으로 돌아갈래? 보미가 장미의 일요일 소동을 다 알아채라고?"


난 더 찍소리 못하고, 몸에 묻은 모든 단팥죽을 씻어냈어.


싱크대를 나오니까 종달새 아저씨도 거기 계시더라고.


"살다, 살다 내 평생에 이렇게 심장 쪼그라드는 장미의 일요일은 처음일세."


"아저씨 저희 안 도와주시고 혼자 노시다 그런 거잖아요, 쳇!"


"그러게 말이다, 나도 오늘 중요한 교훈 하나 배우고 하루 마감하는구먼."


하긴 놀라긴 종달새 아저씨가 제일 놀라셨을 거야.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우린 스노우 글로브 안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잠깐이나마 일탈한 것으로 충분히 짜릿했거든.


우린 스노우 글로브 안으로 돌아가서 원래대로 자리 잡았지.


"이번 해도 꽤나 흥미로운 장미의 일요일이었지?"


"네, 아빠. 조금만 더 짜릿했다가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래도 버번위스키 들어간 단팥죽 맛있던데요?"


종달새 아저씨도 한 마디 거들었어.


"내가 그 버번위스키 들어간 단팥죽 탐내서 좀 맛보려고 부엌 서성이다가 보미한테 딱 걸린 거 아녀."


"앗, 아저씨 맛보지 못하신 거예요?"


"아쉽게도 그렇게 되었구먼 그래."


"괜찮아요 아저씨, 오늘부터 12월 22일까지 밤은 점점 더 길어지기만 하는 걸요? 동지까지 매일 마법의 시간이 길어지니, 내일 밤에도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죄송합니다, 우리 아들내미가 이렇게 철이 없어서."


아빤 맨날 내가 철이 없대. 좋은 거 나눠먹자는 건데 말이야.


"허허, 아닙니다. 맞아, 꼬마 사슴아. 밤은 점점 더 길어지고 마법은 점점 더 깊어지겠지. 어둠의 계절이니까."


곧 동이 틀 것 같아서, 우리는 그렇게 마법의 달과 인사했어. 몇 시간 뒤면 또다시 찾아올 달이니, 금방 다시 보자고 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밤이 길어질수록 마법이 깊어진다는 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절대 보미한테 얘기하면 안 돼, 알겠지?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여덟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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