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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26. 2021

봄날의 단상 두 개

#1 병원 대기실

아들이 허리가 아파서 척추전문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진료실 의자에 앉아있다.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간호사, 직원, 환자들이 저마다 큰 소리를 주고받느라 꽤나 소란스럽다.


옆에서는 어르신 한 분이 지난번에 떼어간 진단서가 잘못되었다며 간호사에게 한바탕 큰소리로 꾸중을 하신다. 본인이 넘어져서 다쳤다는 문구가 빠졌다고 병원이 잘못했다고 다시 떼어달라고 하신다.

간호사가 다시 문구를 확인하고, 또 다른 간호사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또 확인하고.

다시 원무과 직원이 어르신에게 말한다. '아버님, 저희가 이미 발부된 진단서 내용을 함부로 고치지 못해요. 법에 걸려요. 정정이 나가려면 지난번 진단서 원본이 필요해요. 이건 사본이구요. 도장이 빨간색이 아니잖아요. 진단서 원본을 가져오세요.'

'아니, 병원이 잘못해 놓고는, 왜 이제 와서 안된대?'

'저희가 잘못한 게 아니죠. 지금 설명드리잖아요. 아버님, 제 설명을 들으셔야죠. 원본을 가져오시라구요'

'원본이 어딨어?'

'저희는 모르죠. 보세요. 원본을 가져오서야 정정해 드릴 수 있어요. 지금은 못해요'

한동안 되네, 안되네. 너희 잘못이다. 아니다 실랑이가 오고 간 후에, 어르신이 '알았다 이놈아'하고는 휙 나가버리셨다.


오지랖 넓게 그 어르신이 이번에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서 길고 긴 통화 안내를 지나고 상담원과 또 어떻게 통화를 해서 이 사태를 해결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 어르신이 젊었을 때는, 종이로 된 서류를 타자기로 쳐서 거기에 손으로 서명을 하고, 철을 해서 보관하는 시대였다. 전화기도 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 정신없게 빨라지고 혼잡한 세상에서, 어르신들은 아직도 낯설어하고 적응을 못한 채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다를까?

핸드폰을 사용하는데 뭔가가 불편한데, 어디선가 바꾸는 기능이 있을 것 같은데 도통 모를 때,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핸드폰을 뺏어간 지 1분도 안되어서 해결을 해서 준다. 심지어 나와는 핸드폰 기종도 다른데. 내가 보호자로 따라간 병원에서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잠시 좌우를 살피고 방향을 찾아야 하는데, 아들은 내 팔을 잡고는 '이쪽이야'하고는 안내를 한다. 내가 보호자인데, 끌려다니고 있다.


사회가 오직 빠른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주로 돌아간다면, 늘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사람들은 다시 그 중심부로 들어서기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밀려나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사회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속도를 조금 늦출 수는 없을까?


#2 단골 재활의학과 물리치료실 안

요즘 들어 거의 매일 출근하고 있는 재활의학과 물리치료실이다. 늘 하던 대로 익숙하게 지정된 침대에서 물리치료를 받는데, 커튼 밖 다른 침대에 막 도착한 환자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병원에 도착해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예'만 서너 번 반복하고 집에 오는데, 그 환자분은 오자마자 물리치료사에게 자신의 근황부터 이야기한다.

'어제로 직장을 그만뒀잖아. 십 년 다녔네' '아, 그러셨어요.' '오늘 아침은 기분이 영 이상하더라구. 그래도 십 년을 다녔던 직장인데 말이야'

'그러셨겠네요' 치료를 준비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물리치료사의 어투이다.

'시간제라도 다시 일을 구해보려고' , '집이 내 이름으로 되어있잖아....'

퇴직, 재취업, 집 문제까지 친한 사람에게나 나눌 법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리치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쏟아놓는다.

치료가 시작되었는지 물리치료사도 다른 자리로 이동하고 이내 조용해졌다.


이 대화를 우연찮게 엿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이 외롭구나. 누구든지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어쩌면 물리치료도 받지만 이야기하고 싶어서 여길 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다를까?

나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상대방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사회적 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도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필요하겠지.

아이들이 모두 다 독립하고 집에는 남편하고 강아지밖에는 없게 되면, 이십 년을 필요한 말 외에는 굳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 남편과 갑자기 드라마 이야기, 옆집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강아지에게 털어놓는 편이 나을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준다는 건 꼭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두 어르신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빠르게 돌아갈수록, 밀려나고 외로운 사람은 더 많아진다. 나이가 들면 더 그렇겠지. 부끄럽지만 나부터가 친정엄마께 안부전화도 소홀하니 할 말이 없다.

나중에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지 걱정하기 전에, 내 주위에 내가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는지 찾는 편이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인 것 같다.

세상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나부터 내 주위에 한 사람 두 사람을 들어주다 보면, 그것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좋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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