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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29. 2021

청소가 좋아지다

내가 생각하는 청소를 하는 기준은 이렇다.

선반 위에 쌓인 먼지는 섣불리 건드리지만 않으면 날리지 않으니 그냥 둔다.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은 한 군데로 모아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처리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책상 위 물건은 정리가 안 된 채로 있어도 뭐가 어디 있는지 다 안다. 오히려 정리를 했다가는 되려 물건을 못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집 안은 집 밖보다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내가 청소기를 드는 때는 금요일 오전.

기숙사에 있는 딸이 금요일 오후면 오기 때문에, 그때를 맞춰서 접대용(?)청소를 시작한다. 비어있던 방이라 특별히 지저분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환영한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겨야 하기 때문에 나름 비장하다. 일주일 동안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물걸레까지 마치고 나면 확실히 전과 다른 느낌이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뽀송하고, 그동안 널려져 있던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나면 거실이 두 배는 넓어 보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밖에 놓여있는 먼지를 없애고, 언젠가 꺼내놓았지만 지금은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제자리로 보낸것 뿐인데, 내 안의 감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거실 바닥의 먼지를 없애면서, 내 마음의 사소한 걱정거리가 같이 빨려 들어간다.

내 마음에 둥둥 떠다니던 걱정거리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로 쓸데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하나 정도 걱정하면 딱 맞을만한데 구십구를 불러들여 백만큼 걱정하는 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인데 안달복달 매달리고 있는 일들이다.


청소기로 평상시에는 닿지 않았던 소파 밑, 구석진 곳의 먼지들을 색출하면서 먼지통으로 쌓이는 먼지 양을 보며 우리 집에 이렇게 보이지 않았던 먼지들이 많았나, 새삼 놀란다.

마음의 걱정거리도 마찬가지이다. 평상시에는 내가 이렇게 많은 걱정들을 사서 하고 있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조용히 들여다보면 차곡차곡 쌓이는 걱정거리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란다. 내 마음 어디엔가 돌아다니고 있는 먼지들을 역시나 같이 색출해서는 쓰레기통에 같이 버려본다.


깨끗해진 거실을 돌아다니면, 내가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발바닥이 끈적해도, 뭔가가 묻어있어도 그러려니 하다가, 어느 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진 집 안을 돌아다니면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점을 몸으로, 내 제일 밑에 있는 발바닥으로 느낀다. 청소한 집을 제일 먼저 그리고 많이 느끼는 부분이 평상시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발바닥이라니. 더러워져도 가장 신경쓰지 않던 발바닥이 깨끗해진 방바닥을 느낄 때, 내 가장 하찮은 구석이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한참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언제 청소했는지 기억도 없을 만큼 일어설 기운조차 없고, 누워 있는 채로 눈을 돌리면 사방이 어질러져있을 때는 그 형편없는 방 꼴이 나 같고, 또다시 형편없는 내 자신이 지저분한 방 같아서 한 번 더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더러운 내 주위, 바닥인 내 기분, 그보다도 더 밑에 있는 내 자존감의 순환고리에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무엇 하나라도 끊어내 버리면 다른 것도 같이 영향을 받는다. 내 기분과 자존감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이 지경까지 왔으니, 청소를 해 본다.

내 몸 제일 밑에 있는 발바닥이 깨끗해진 방바닥을 디디면 마음도 같이 보송보송해진다.


책장을 정리하다 보면,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중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을 정리한다. 십 년째 그 자리에 있지만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책, 예전에 사다 놓았지만 지금은 필요가 없는 책, 잊고 있었지만 반가운 책들.

안 읽을 책들을 추려서 버리고 대신 빈 공간을 내게 선사한다. 이전의 고민들로 사 모았던 책들을 버리면서 그때 힘들었던 나를 생각하고는 웃어준다. '애썼다'라고 나지막하게 인사도 건네본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상 손 닿는 곳에 다시 놓으며 눈길을 보낸다. 다 읽으리라. 작은 기쁨이 새롭게 놓인 책과 함께 내 눈길에 닿는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마음이 정리된다.

책을 읽으면 내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자신이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버려진 책들이 있던 공간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도 같이 덜어낸다. 그 비어있음이 내 마음에도 스며드는 것 같아서 훨씬 가볍다. 생명이 없는 책장이라고는 하지만, 들어가지 않는 책을 억지로 밀어 넣어가면서 나무이지만 터질 것 같았던 공간을 비워놓으니, 나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해피포터 시리즈를 다시 읽을 생각이다.

네 번 정도 읽었는데, 다시 또 완독해 보려 한다.

우스울 수 있지만, 내가 해리포터를 읽으면서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책에 숨어있는 복선과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고, 책에 나오는 마법주문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먹고 살아가는 일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해피포터를 완독하고 다 정리를 하고 나면, 나만 아는 성취감 뿌듯함을 얻을 것 같다. 그 원동력이 먹고 살아가는 일에도 추진력을 줄지 누가 아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매일 청소할 생각은 없다.

한 번 청소했을 때 효과를 대화하기 위해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보다 자주 하지는 않는다.

비포 앤 애프터 차이를 확실히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귀찮아서가 아니다.

금요일의 뿌듯함을 위해서, 오늘 나는 물건을 어지러뜨리고, 머리카락을 떨어뜨리고 있다.

일상의 번잡함도 한 번 치운다고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고 늘 새롭게 생긴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치워주고 정리하면 되는 거겠지.

금요일의 청소 덕분에 오늘의 번잡함이 별로 큰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치워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말처럼 간단하지 않은 걱정거리들도 많다. 결코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큰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걱정거리도 여럿이 힘을 합쳐 번쩍 들어다가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버리면 좋을 텐데 생각이 든다. 매번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노력해본다.

언젠가는 청소기를 돌리면서 득도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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