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이 기숙사에 더 이상 못 있겠다고 집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선언했다.(젠장할, 아닛 이것은 마음의 소리이다. 결코 밖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2년 동안 기숙사에 있으면서 나름 차곡차곡 쌓였던 내상이 고3이 되면서 더 예민해지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가타부타 묻지 않고, 본인이 원한다 하니 그러라 했다.
불똥은 내게 튄다.
아무리 혼자서 다닌다고는 했어도, 잠이 10분이 아쉬울 때인데 내가 집에 있는 날은 되도록 학교까지 데려다주려고 한다. 다른 고3 엄마는 진작부터 했다는 기사 역할이 시작되었다. 운전이야 하면 되는 건데 요즘 들어 유난히 짜증이 심해진 딸을 덤덤하게 넘어가 주기가 영 쉽지가 않다.
집에서 등교하는 첫날, 비상도 이런 비상이 없다.
매일 늦게 일어나다가 알람까지 맞춰놓고 전날 일찍 잠에 들었는데, 나도 긴장을 했는지 알람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이것저것 사부작 거리면서 딸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잘 잤냐?'는 인사에도 듣는 둥 마는 둥. 딸의 기분을 알아야 대응방안을 마련할 텐데, 좋다 싫다 말 한마디가 없으니 괜히 나 혼자 안절부절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부아가 치민다. '아니, 지가 고3이지, 나까지 고3인가. 대한민국에 자기 혼자만 고3인 줄 알겠네'(물론 속으로만 한 말이다)
아침을 거하게 차린다고 먹어줄 상황도 아니니, 며칠 전부터 고민해서 사다 놓은 오트밀을 타 줬다. 기껏 대령했더니 하는 말이, '물 말고 우유는 없었어?', (예이, 다음부터는 우유로 대령하겠나이다) 그래도 드셔주시는 것이 어디냐 싶고, 빈 속으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다. 아까의 분한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주기만 한다면야 귀한 음식이라도 대령할 수 있는데, 고작 우유가 대수냐 싶다.
일절 도움이 안 되는 남편까지 아침부터 거든다. 괜히 관심은 보여야 딸의 미움을 안 살 것 같아서 이것저것 거들기는 하는데, 하는 말마다 포인트가 안 맞아서, 오히려 내가 더 불안하다. 자기 딴에는 뭐라도 한 마디 딸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는 것 같은데, 차라리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운전병이 장군님 모시듯 과속도 안 하고 조심조심 운전을 해서 등교를 시키고집으로 오는 길에 화가 나지는 않고 왠지 슬퍼졌다. 날씨가 이리도 좋은데, 신나게 뛰어놀아도 부족할 청춘에 지는 뭔 고생이고, 덩달아 나는 웬 고생인지 말이다.
앞으로 족히 7개월은 이렇게 긴장 속에서 온 가족이 지내야 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결국 가족 간에 위기를 해결하는 열쇠는 '마음'인 것 같다.
엄마가 입시를 대신해줄 수는 없고, 옆에서 지켜봐 주는 마음만 갖고 있을 뿐이다. '지가 제일 힘들겠지, 나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고, 본인은 얼마나 스트레스받고 불안하고 그럴까?'마음이 안쓰러워진다.
딸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보여주자. 내가 응원하고 있다는 마음을 보여주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는 없고, 이게 진심으로 전해진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나 싶다.
딸 방문에 '힘내라 파이팅'플래카드를 걸어놓을 수도 없고, 설사 건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는 사자 코털을 건드리는 거나 진배없다.
세상 가장 중요한 게 '진심을 전하는 일'인 것 같은데, 그게 또 동시에 세상 어렵다.
일단은 나부터가 진심을 전하는 일에 많이 서툰 것 같다.
말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식사를 정성스럽게 챙겨준다.
아침은 잘 안 넘어가니까, 선식이나 오트밀, 과일주스로 대령. 낮에 집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저녁을 뭘 먹일까 메뉴를 고심 고심해서 짠다. 일주일치 식단을 대략 짜 놓고 이에 맞춰서 장을 본다. 집에 있는 식재료 우선으로 처리할 메뉴를 짜면 버리는 재료도 없어서 좋은 것 같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 들쑥날쑥하는 음식 솜씨도 평균 이상을 유지하니, 음식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딸도 인색한 칭찬을 다한다.
결국에는 주말에는 불고기와 연어와 갓 담근 김치로 성공적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흡족한 표정을 짓는 딸과 오랜만에 핑크빛 시간을 가졌다.
자식이 뭔지, 제일로 어렵다.
엄마마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방법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잘 못 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소리를 안 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많은 경우 내가 참고 말지 하는 것 같다. 참아내기 어렵고 힘든 경우들도 많았지만, 운이 좋게도 아이들은 요즘 내가 큰 소리를 낼 경우를 아예 잘 만들지 않고 잘 지내주고 있다.
고3이야 어떻게 하겠는가? 온 대한민국이 1년에 한 번 앓는 홍역인 것을. 그 홍역 한가운데에 있는 딸을 안쓰럽다 생각할 뿐이지, 그나마 믿는 엄마에게 짜증 좀 낸다고 하더라도 맞받아 칠 생각은 전혀 없다. 지도 알면서 저러겠지. 그 스트레스를 어디다 풀 데도 없는데, 엄마한테 이 정도쯤 푸는 것은 그나마 좋은 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마저도 못하면, 아이 마음이 어떻겠나?
고3이 빨리 지나갔으면 싶다가도, 천천히 다가왔으면 싶기도 하다.
온 가족이 살얼음을 걷는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가도, 딸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금도 얼마나 시간이 휙휙 지나가는 것 같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나? 시간은 자기 흐르는 대로 흘러갈 텐데 말이다.
유난히 맞는 소리만 따박따박 하는 딸이 얄미울 때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다르게 하면 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립겠지. 이런 딸과의 실랑이를 누군가는 부러워하겠지 싶다.
그래도, 고3 짜증은 반드시 마감일이 있어야 한다. 입시가 끝나는 날, 하루 종일 약속을 잡고 밖에서 축제를 즐길거다. 아예 안 들어올 수도 있다. 딸이 즐거워하는 날이기도 하고, 내가 더 기쁜 날. 그 날 이후부터는 한동안 밥도 안 하고 지내볼까 한다. 하지만 마감일 그 날까지는 나의 계획은 비밀인 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