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전 원격수업 들을 때부터 지금까지 집 안에서 서로 부딪히는 기간이 길어져서일까, 이제 본격적으로 딸이 고3 스트레스에 시달려서일까, 요즘 딸과의 긴장감이 상당하다.
며칠 전 저녁식사를 만들다가 옆에서 여느 때처럼 깐깐하게 잔소리를 하는 딸에게 갑자기 화를 내버렸다. 딸도 흠칫 놀란듯 했고, 나도 기분이 상해버려서 둘 다 냉전 시작.
좁은 집, 어디 피해 다닐 데도 없는데 서로 거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기 그지없게 눈도 안 마주치고 태연한 척해보지만, 딸이나 엄마나 발연기가 따로 없다. 평상시 같았으면 하루에 수십 번도 찾았을 '엄마'소리가 줄어들어 어색하게 조용했던 집안 공기는 딸이 먼저 파스타를 해 주면서 풀어졌다. 먼저 화낸 사람의 미안함때문에, 맛있다 소리를 연신 하면서 파스타를 먹었다. 사실은 좀 뻑뻑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세상 제일 맛있는 파스타이다.
그렇게 다시 좋아진 분위기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저녁에 딸이 내 방에 와서는, 수시 전형에서 새롭게 준비해야 하는 게 있다고 인터넷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냐고 이야기를 한다. 나도 처음 듣는 내용이고 입시 요강에는 없던 내용이니까, 나중에 학교 진로 선생님에게 물어보자고 했는데, 뭐에 심통이 나서는 방 문을 나서면서, '읽어보기는 했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또 내 신경을 건드려버렸다. '왜 나한테 그래?'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가 계속 참아줬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제는 나도 모르게 임계점을 넘어가는 듯했다.
사춘기도 심하지 않게 지나간 딸, 좋은 거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는 딸, 맹한 엄마보다 훨씬 더 야무지게 이것저것 챙기는 딸. 너무 믿고 너무 의지했나 아차 싶었다. 그래 보았자 이제 18살 고 3인 아이인데, 다른 집은 엄마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고 보살피느라 바쁠 나이인데, 헐렁한 엄마 만나서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늘 마음 한 구석이 미안해서, 나는 그냥 참아줘야 한다고 꾹꾹 눌러왔던 마음이 요즘에는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튕겨져 나오는 것 같다.
18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일 텐데, '이건 또 뭔가?'싶어 불안한 마음에 엄마한테 달려왔을 텐데, '그럼 그건 엄마가 알아볼게.' 해 줄껄. 막상 질러놓고 또 소심한 마음에 후회가 밀려온다. 그 날 저녁 내내, 어떻게 화해의 말을 건넬까. 속으로 연습하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네가 고3이라서 마음이 많이 불안할 텐데, 엄마가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해. 너도 엄마한테 이건 좀 도와줘 라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밤이니까 날 밝으면 말을 꺼내봐야지. 다짐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대단하게 연습했던 대사는 어디로 가고, '피자 시켜줄까?'로 말을 꺼내버렸다.
좀 더 멋있게 딸과 대화를 시도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책에서 읽은 대로 서로를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하지만 이랬으면 좋겠어 세련되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실상은 왜 이렇게 어색하고 어려운지.
그래도 속이 너무 뻔하게 들여다 보이는 나의 화해시도를 딸은 '어'라고 짧고쿨하게 수락해 주었다. 하지만 어리바리한 엄마가 주문을 실수할까봐 자신이 먹고 싶은 피자종류, 브랜드, 갈릭치즈 하나 추가, 치즈토핑까지 야무지게 정리해서 전달해 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역시 우리 모녀 사이에는 먹는 걸로 해결하는 방법이 제일 확실한 것같다.
오늘은 화기애애하게 자소서에 대해 같이 논의했다.
연 이틀 냉전 이후 모처럼 맞은 대화 분위기를 틈타, 오늘은 자소서에서 '진로를 결정하게 된 동기'에 들어갈 문구에 대해서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서 서로 흡족해했다. 우리 모녀의 고3 대학 입시 전략에 특별한 구석이란 없다.
회의는 주로 내 방에서, 일단은 둘 다 누워서, 딸이 자기 생각과 계획을 이야기하면, 내가 들어주고 내 의견을 이야기해주는 순서로 진행이 된다. 마음이 불안하니, 내 앞에서 이런저런 자기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공부를 이야기하면서, 본인도 방향을 잡고 마음을 다스리려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아이의 공부에 무심한가?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의 공부에 대해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자 답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질문이 내게서 쉬이 떠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와 아이가 잘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아이가 내게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입시에 대해서 빠삭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맞춰 나가고 딸아이의 이야기에 동참하면서 우리는 팀이라는 생각이든다.
아이 혼자 하지 않고, 엄마 혼자 하지 않는, 한 팀으로서 우리는 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우리의 방구석 회의 결과로 이번 주말에는 도서관에 같이 가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미술관을 같이 갈 것이다. 우리 모녀는 아직도 이 혼돈의 고3을 어떻게 잘 보낼지 여전히 잘 모른다. 아마 계속 불안하고, 걱정할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10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우리는 좋은 한 팀이라는 사실 하나만 확실하다면, 그 시간이 우리에게 많은 배움을 가져다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모녀가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고 어떻게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워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값진 결과물이 될것이다. 그게 내게는 딸의 입시공부에 버금가는 큰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딸아, 우리 잘해보자. 엄마가 네 공부를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네 공부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네가 느끼는 불안을 나눠갖고, 네 계획에 동조해주고, 엄마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고,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생각들이 나오고. 그렇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인생에 지금 고3만큼, 아니 더 힘든 일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지금처럼 엄마 방에서 우리 회의를 하자. 엄마가 네 인생을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방에서 뒹굴거리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좋은 생각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그러면 또 지금처럼 하나하나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고3 딸 덕분에, 엄마도 공부가 늘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인생공부. 이 놈의 공부는 답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