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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싱 Nov 11. 2020

쌈짓돈과 고모야

 그날은 유난히 안개가 많아서 운전하기 힘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애꿎은 자동차 핸들을 틀어 쥐었습니다. 운전도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덜덜 떨리는 발로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어둑한 산길을 달렸습니다. 나에게, 아니 그녀에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주말이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한 주는 어땠는지, 사는 이야기, 회사 이야기, 연애 이야기처럼 늘 하던 이야기를 주고받고 집에 막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고모가 위독하다. 빨리 내려와야 될 것 같구나.”


 길지 않은 통화.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구미에 계신 본인을 데리고 합천에 있는 병원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급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합천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매! 고모야 좀 바꿔주세요..”

“야 지금 듣도 몬할낀데…”

“그냥 고모야 귀에 대주세요.”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겠다 하시며 전화기를 고모야 귀에 갖다 대주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고모야. 내 지금 내려 갈게. 조금만 기달리라. 내 금방 간다.”


 그리고 그대로 터미널로 달려가 구미행 고속버스 티켓을 끊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 티켓을 끊고 좌석에 앉고 나서야 고모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내 지난 어린 날 짓궂은 장난에도 꾸짖지 못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웃어주던 그녀의 생각들이…


 우리 고모야는요, 앉은뱅이입니다. 그리고 손도 온전치 못해 겨우 몸을 끌어서 움직이는 용도로 사용해, 차디찬 손에는 언제나 굳은살이 배겨 있었습니다. 어째서인지 큰소리도 내지 못해서 언제나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곤 했습니다. 철 모르던 나는, 시골 할머니 집 앞 언덕을 올라가면 언제나 대청마루에 앉아 나를 불러주던 고모야를 향해 달려가서 간지럽히곤 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피하면서 ‘아이고 하지 마라~’ 그랬던 기억이 버스 까만 창문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두 분입니다. 우리 큰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첫째 부인으로 고모야가 하늘나라 가기 몇 달 전, 먼저 가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둘째 할머니의 아들입니다. 호적상으로는 아마 첫째 할머니 둘째 아들로 올라가 있던 것 같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고모야는, 저의 작은 할머니, 즉 친할머니의 딸입니다. 아버지의 친남매입니다.

 그 시절 정실부인을 두고 둘째 부인을 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나 봅니다. 그래도 가야 땅에서 조금 유복했던 집안이었는지, 가난했던 우리 할머니를 둘째 부인으로 들여서 자식을 낳았다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 기억이 납니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지만 손자였던 나를 참 많이 예뻐하셨습니다. 청포도 사탕을 늘 쥐여주며 ‘니 무래이’ 그러시곤 했죠. 하지만 그 시절 어른들이 으레 그랬듯, 딸들에게는 참 엄격하셨다고 합니다. 둘째 고모가 공부한다고 마당에 책들을 던지고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어떤 분이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 큰 할머니는 욕심과 질투가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지만 어릴 때 언제나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다 꽃 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날, 지금의 내 나이와 비교해도 한참은 어린 나이에 그렇게 시집을 왔습니다. 결혼 전 얼굴도 몰랐던 어느 남자의 아내로, 그리고 이미 아내가 있는 있던 집의 첩으로 말이죠. 누구 하나 편한 상대 없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세월, 어리디 어린 나이에 우리 아빠를 낳고, 엄마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숨죽이며 살아가던 어느 날 셋째 딸을 임신한 우리 할머니. 

 집안에 큰 할머니는 아들을 둘이나 낳았고, 이미 아들을 가졌던 우리 할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가져서 식구를 늘리기 두려우셨나 봅니다. 아니면 큰 할머니의 시샘과 눈치, 숨 쉴 곳 없는 산골짜기 집에서 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게 아이에게 미안해여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애 떼어내는 약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게 참 쉽게 없어지지 않는지,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지 엄마를 닮고 또 아빠도 닮고 또 자기 오빠를 똑 닮은 여자아이가. 그 아이는 성장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은 느렸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커서, 두 발로 온전히 서고 걸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귀여운 여자아이로 성장하던 어느 날,


“엄마 내 몸이 아프다.”

“그래? 그라믄 앉아서 고마 쉬라”


 그렇게 앉은 아이는 본인이 오십 평생을 앉아 지낼 줄 알았을까요? 

‘아프다. 아프다’는 그 말에 할머니는 그저 앉게 했을 뿐인데… 

뛰어 놀 정도로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마당을 총총거리던 그 조막만 한 아이는, 어느 날 몸이 조금 아팠을 뿐인데……

일어서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근처에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서 굿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아프다는 말만 곱놓을 뿐, 아이는 다시는 두발로 서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찾아간 병원에서는 소아마비라고 말해주며 손 쓸 수 없음을 통보할 뿐이었습니다.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우리 고모야는 용돈을 꼭 주시곤 했습니다. 어디 선반 위에 꼬깃꼬깃 올려 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못쓰는 손으로 떨구고는 그 손으로 몸을 지탱하기에도 버거운지 머리로 돈을 밀어주며 ‘까까 사무라’ 그렇게 철없는 조카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면 그 조카는 신난다고 그 돈을 받으며 ‘고모야 고마워!’ 그러곤 주머니 속으로 엄마 몰래 숨기곤 했죠. 

 그 돈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기까지, 나는 참 오래 걸렸습니다. 그게 고모야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 표현이었는데. 그때 좀 더 고마워할 것을. 그때 고모야 고맙다고 따뜻하게 안아라도 주지….

 나이가 들고 고모야에게 선물이 하고 싶었던 나는, 고모야가 늘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티셔츠 몇 벌을 사서 시골로 갔습니다. 언제나처럼 오르던 시골 돌담길 언덕에는 고모야가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고모야는 베개에 머리를 박아두고 더 가늘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어디가 불편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냥 머리가 무거워서’라고 답했습니다. 티셔츠를 사 왔다고 말하자 얼굴에 이내 화색이 도는가 싶더니 막상 쇼핑백에서 꺼내 보여주니 퍽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의외로 옷 보는 기준이 까다로운 그녀였습니다. 



 구미에 가보니 어머니는 이미 차를 렌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기에 적막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국도로 차를 몰았습니다. 렌터카여서 기름이 없어 참 야속했습니다. 혹시나 그녀의 마지막을 못 보면 어쩌나. 운전 미숙인 내가 합천 그 산길을 이 안갯속에서 달리다가는 모두의 장례식이 되겠구나 싶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합천의 병원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병원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조금은 미로같이 복잡한 복도들을 지나 우리 할머니가 앉아 계시는 병실로 들어갔을 때 어딘가 익숙한, 작년에 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맡았던 누린내가 코끝을 스쳤고,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터벅터벅 고모야 침대로 걸어갔습니다.


 바짝 말랐던 몸이, 더 피골이 상접해서, 뼈와 작디작은 근육마저 보일 정도로 야윈 몸. 수건 같은 것으로 눈을 가려 놓아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입은 물에서 잡아 올린 생선처럼 뻐끔거리며 기능하지 않는 폐로 숨을 들이켜고, 소리 없는 단말마를 뱉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차갑고 딱딱한 손을 살포시 잡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맡에 다가가 울지 않고 말했습니다.


“고모야. 내 왔다. 견디느라 고생했다. 내 왔으니까, 내 이제 왔으니까… 이제 싸우지 말고 그만 쉬어. 옆에 있을 게.”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뻐끔거리던 입은 아주 천천히 멈추더니 이내 바이탈 모니터가 크게 요동치고는 하나의 긴 선을 그리며 멈추었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내가 이제 쉬라고 한 후, 그녀는 영영 휴식을 받아들였나 봅니다. 


“니 기다렸는가 보다… 조카 기다렸나 봐…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노! 내 죄다. 내 죄야.”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곱놓으며 병실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고모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청각이 가장 늦게 상실된다는 사실을 들었던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메이는 목소리로 고모야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만약에, 다음 생이 있으면 고모야, 그때는 두 팔다리 다 건강하게 태어나가 가고 싶은데도 다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그렇게 살아. 내가 늦게 취업해서 용돈도 제대로 못 줘서 미안해. 내가 좋은데 못 데려가 줘서 미안해. 미안해.”



 얼마 후 날이 밝고 고모야를 화장터에 맡기고 화장을 했습니다 장례식은 없었습니다. 화장터에 화장하는 동안 고인의 영정사진을 두는데, 우리 고모야는 그 흔한 영정사진마저 없었습니다. 생전 친구도, 챙겨주는 가족이라곤 할머니뿐이던 우리 고모야는 고요하게 한 줌 재가 되었습니다. 사진으로 그녀의 예쁜 모습이라도 한 장 찍어둘걸, 우리 중 누구도 그녀의 단독 사진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영정사진 하나 없는 화장터 가족대기실 돗자리에서 홀로 앉아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다가와 말해주었습니다.


“작년에 너희 고모 아프다 해서 병원 갔을 때, 고모한테 물어봤다? 오빠 보고시프냐고.”

“오빠 보고 싶겠지.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 하나뿐인 친오빠인데…”

“그랬더니 고모가 고개를 저으면서 그러더라. 너가 보고 싶다고.”


 고모가 화장되는 동안 외국에서 일하고 계시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래전부터 해외에서 떨어져서 근무하시는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는 한참을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여오는 목소리로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고맙다 아들……”


그러고는 10분 동안 그저 울기만 하셨습니다. 자기 동생의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본인은 얼마나 그 마음이 터져 나갔을까? 얼마나 자신이 원망스러웠을까?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모야의 재가 나무 상자에 담겨 나왔고 큰아버지는 그 유골을 고모야의 생전 집 근처에 뿌리자고 했습니다. 저는 역정을 내며 ‘평생 눈뜨면 보던 게 맞은편 골짜기이던 고모야, 죽어서도 거 있으라고 할랍니까?’ 하며 강이나 하물며 안되면 시냇가에 라도 뿌리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내가 너무 완강했는지 할머니 집 가는 길 물 흐르는 냇가에 차를 세웠습니다. 


 유골함을 열어 그 안에 있던 그녀의 재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잡아도 아직 따뜻했습니다. 뼛가루를 손으로 움켜잡아 냇물에 잘 흐르게 고루 뿌려주었습니다. 냇물에서 부디 강으로, 바다로, 그리고 구름 되어 비가 되고 그렇게 생전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한 많은 곳을 가길 바랐습니다. 


 이제 고모가 떠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그 일 이후 나는 오늘까지 단 한 번도 고모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 잊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회사에 치이고, 삶에 지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만나고 그리워하며 나의 20대도 저물었습니다. 자주 전화하겠다던 할머니의 번호를 통화 목록에서 찾기 어려웠으며, 그 사이 저의 누나는 신기하게도 삼촌을 닮은 아이를 낳아 매형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살았습니다. 세상에 고모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이젠 나조차도 그녀에 대한 기억이 예전 같지 않나 봅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도 예전처럼 뜨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기구하게 그리고 안타깝게 스러져간 인생도 있다는 것을. 내가 추억하지 않으면 세상에 추억해줄 사람이 거의 없어지는 사람도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이름 모를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잠깐이라도 추억해 주길 바랍니다. 


 그녀는 그 꼬깃한 쌈짓돈 외에도 참 많은 선물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약자에 대한 다정함을, 건강함에 감사함을, 그리고 평범함에 소중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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