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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21. 2024

상상(1, 2)

어떻게 더 나은 전문가가 될 것인가

상상     


2023년 10월 16일 루마니아 적십자 자원봉사자들이 부큐레슈티에서 열린 ‘세계 심폐소생술의 날’을 기념해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음악은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Stayin’ alive), 미국심장협회와 영국심장재단이 심폐소생술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로 선정한 곡이다. 어떤 응급의학과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이효리의 ‘텐미닛’을 상상하며 흥얼거린다고 한다. 물어보니 분당 압박수와 리듬이 비슷하고 ‘십분’이라는 시간이 심폐소생술 속에서 갖는 오묘한 느낌 때문이라고 했다. 두 노래 모두 박자가 분당 압박수와 비슷하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때론 진단할 때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고등학생이 농구대에 부딪혀서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다고 내원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확인해 보니 오른쪽 아래쪽 세 개 늑골이 연속적으로 부러져 있다. 통원치료를 설명하고 흉부외과 외래를 잡아주기로 한다. 경험이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권투선수의 얼굴이 펀치를 맞아 일그러지는 슬로우비디오 장면을 보는 것처럼 늑골을 부러뜨린 충격이 몸에 전해지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과연 그 충격은 세 개의 늑골만 부러뜨리고 소멸됐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연속된 하부 늑골골절이 있다면 반드시 복강내 장기 손상을 확인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연속된 상부 늑골골절의 경우 경추 손상을 확인한다. 다시 물어보니 농구대에 부딪힌 게 아니라 농구대가 쓰러지면서 옆구리를 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외상환자의 병력 청취 과정에서 물어보는 것은 세 가지다. 시간, 장소, 매개체(vector).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다. 대학생이 강당에서 여러 명이 보조무대를 옮기는 과정에서 배를 부딪힌 후 발생한 복통으로 내원했다. 부딪힌 부분에 약간의 압통이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소견이 없어서 진통제 투여했고 최근에 공연 막바지 준비로 무리를 했다고 해서 수액을 맞았다. 두 시간 정도 후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고 특별한 이상소견이 없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하러 가보니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복부 강직이 있었고 복통은 더 심해졌다. 어쩌면 이 사례를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초기 대응이 잘못된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경험이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장정 대여섯 명(나중에 확인됐다)이 낑낑거리면서 옮겨야 할 정도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보조무대를 한 번쯤 상상했어야 한다. 한 손으로 가뿐히 들 수 있는 소품에 부딪힌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다면 응급실에 올 생각도 안 했겠지만. 

내원 당시 복부 검진이 큰 의미가 없는 건 복강에 고인 혈액이 심한 복통을 일으킬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환자는 초기에 복부 CT를 시행했어야 했다. 환자는 비장파열로 인한 혈복강으로 수술받았다. 

열여섯 살 남학생이 복통으로 내원했다. 함께 온 아버지 말에 의하면 사흘 전에 복통이 있다가 좋아졌고 오늘 갑자기 심해졌다는 것이다. 복부 진찰을 하려고 했지만 잠깐 누웠다가 곧바로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당시에는 응급실에 빈자리가 거의 없어서 중증 환자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제가 내과 전문의고 여기 졸업생인데 응급실에서 복부 CT만 찍어볼 수 없을까요?”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보호자가 부탁하는 투로 말했다.  

다시 근처 병원으로 안내하고 당직실에 들어와 있는데 당직 내과의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슨 접수만 시켜주면 자신이 알아서 검사를 하고 판독까지 받아서 퇴원시키겠다는 것이다. 결국 접수를 시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복부 CT를 촬영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검사대에 누워있지 못해 실패했다. 거의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마약성 진통제를 여러 차례 준 상태에서 겨우 촬영했다. 비장파열에 의한 혈복강이었다. 부랴부랴 외과에 연락이 됐고 수술방으로 올라갔다.  


잠깐의 진찰 동안에도 누워있지 못할 정도로 배에 힘이 들어간다는 건 복부강직이 심하다는 것이고 그건 외과적 문제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내과적인 문제는 어련히 알아서 확인하지 않았겠는가. 외과적 문제가 강력하게 의심됐기 때문에 복부 CT를 그토록 찍고자 한 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외과적 원인을 확인하고자 한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수술 설명을 하러 내려온 외과의와 얘기하는 걸 듣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사흘 전에 환자를 혼내다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야구방망이 끝부분으로 배를 가격했던 것이다. 체면상 그건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수는 덮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부모건 의사건 간에 말이다.      

이백 년 전에는 목수와 석공만 있으면 대부분의 주택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창문과 문, 수도시설, 조명과 보일러를 다루는 전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벽난로만 다루는 전문가가 필요할 때도 있다.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 제조업체의 그 누구도 혼자서 자동차를 조립할 순 없다. 

건축이나 자동차 뿐 아니라 의료에서도 ‘제네랄리즘’ 또는 ‘제네랄리스트’는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사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이가 들면 백내장도 생기고 무릎 관절도 닳고 혈압도 높아지지만 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의사는 TV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응급실에서는 필요하다. 모든 걸 할 줄 아는 의사가 아니라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감독해 줄 의사 말이다. 


다발성 외상 환자를 한 명 상상해 보자. 이십 대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자동차와 부딪혀 내원했다. 안면이 부었고, 왼쪽 쇄골 근처와 흉곽 아래쪽에서 복부쪽으로 손바닥만한 찰과상이 있다. 오른쪽 허벅지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다리가 뒤틀려 있다. 

다발성 외상 환자를 잘 보기 위해서 필요한 건 상상력뿐만이 아니다. 혼란스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침착함과 오랜 시간을 견뎌낼 인내심도 함께 필요하다. 환자의 문제가 어느 정도 파악됐다면 검사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검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되다가 점점 의식이 흐려질 수도 있고, 통증 때문에 잠시 정상처럼 보였던 혈압도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갑자기 떨어질 수 있다. 다른 과 의사들은 모두 자신의 과로 입원 되기 전까지는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전제하에 일을 진행해야 한다. 기도유지가 잘 되는지, 출혈 부위는 없는지, 혈관확보가 필요한지, 경추 고정을 풀지 말지에 대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응급의학과 의사다.  


어쩌면 운이 좋다면(?) 흉부 엑스레이를 찍은 후에 모든 게 결정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왼쪽 늑골골절과 함께 장음영이 흉곽에서 발견된다면 횡격막 파열로 응급수술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의 검사만으로 입원 과가 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 가지 검사를 장시간에 걸쳐 시행해야 결론이 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다. 오늘 저녁 여섯 시에 온 환자가 다음 날 새벽 여섯 시가 되도록 입원 과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결국 모든 과가 빠져나가면 종종 응급의학과에서 입원을 시키기도 한다.  


‘전문화된 일반의’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실현 불가능한 모순적인 단어의 조합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병원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외래로 약을 타러 자주 병원에 들르는 사람들조차도 ‘전문의’가 ‘일반화’된 한국 의료시스템에서 ‘전문화된 일반의’가 대체 왜 필요한지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을 지을 때도 여전히 각 분야의 전문가뿐 아니라 작업 전체를 감독하는 솜씨 좋은 목수가 필요하듯 다발성 외상 환자에게도 침착하고 인내심 있는  ‘전문화된 일반의’가 필요하다. 덧붙여 이들의 침착함과 인내심을 유지하려면 ‘스테잉 얼라이브’보다는 훨씬 긴 노래가 필요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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