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18-1)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0117 두 번의 줌


처음에 줌(ZOOM)으로 대본리딩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왠지 연극이 갖고 있는 ‘아날로그’스러운 느낌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왜 처음부터 이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동선을 긋게 되면 반드시 만나야겠지만 대본 리딩만 한다면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연습을 시작한 초기에는 연습이 없는 기간 동안에는 각자 혼자서 읽어보고 만나서는 동선을 긋는 걸로 암묵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두 직장과 집안일로 바쁜 데다가 상대역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대사만 읽는 게 별다른 효과가 없어서 동기부여가 안 됐던 것 같다. 특히 조련사를 연습하던 시기에는 극의 절반 정도 까지는 대사가 거의 없고 리액션이 전부여서 혼자서 대본을 읽다 보면 읽는 것도 아니고 안 읽는 것도 아닌 상황에 대한 급 ‘현타’가 오곤 했다.


조련사 역을 맡은 성복을 도와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같이 대본리딩을 하기로 했다. 동서고금과 분야를 막론하고 좀 더 나아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연습이다. (정직이 아닌) 연습만이 널 지킬 수 있는 무기다(대사를 조금 바꿨다). 둘만 하면 되므로 페이스타임을 이용했다. 페이스타임을 연극 연습 도구로 사용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앞부분을 중심으로 몇 번 반복해서 읽었다. 끝나고 나니 내가 연습을 더 많이 한 것 같은 이 부조리한 느낌은 뭐지.

캐릭터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장면이 요구하는 감정에 충실하고 성복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계속 지적해 온 부분이다. 밋밋한 캐릭터에 적절한 감정표현을 하는 연기와 특이한 캐릭터에 부적절한 감정표현을 하는 연기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런 선택의 상황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고 했다. 아무튼 아무리 성복이 누군가를 흉내 내서 조련사를 연기해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국 그건 성복의 조련사일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 문득 명언 하나가 떠올랐다. 연기는 남을 흉내 내는 것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자신을 찾는 걸로 마무리 돼야 한다. 어디서 주워 들은 건가 내가 생각해 낸 건가.


최근에 읽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괴테 전문가 도이치가 티백 꼬리표에 적혀 있는 문장-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Goethe(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의 출처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명언이 만들어지는 세 가지 방식(전승형, 요약형, 위작형)이 나오는데 아마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명언은 전승형일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신입생이었던 나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던 낙근이나 무대에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연습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찍 불러서 장면 연습을 시켰던 선규와 같은 연극반 선배들이 해줬던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런 이야기들을 ‘선규 형이 한 얘긴데, 혹은 낙근 형이 한 얘긴데’라는 말로 시작해 나 또한 후배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언젠가 선규와 은하가 얘기하다가 일상을 연극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얘길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낙근은 새벽 세 시에 분만을 받고 퇴근해서 대학로 아르코 극장에서 청우극단의 공연 영상을 음성만 녹음했다. 중간에 일이 생겨서 병원에 다시 들어갔다가 오는 수고를 감수하며. 취미를 시작하면 장비빨부터 세우는 아저씨마냥 형사역을 맡자마자 검색을 해서 소품으로 적당한 밧줄을 발견했다. 전에 마련했던 두 가지 밧줄 모두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너무 두껍고 색깔이 안 맞고 다른 하나는 재질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전에는 ‘로프’(그땐 희곡 <로프>를 읽은 후여서 이 단어로 검색했던 것 같다)로 검색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밧줄’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넣으니 ‘성인 놀이밧줄’과 ‘성인 밧줄플레이’가 뜬다. 맨 위에 있는 ‘성인놀이밧줄’로 검색해서 오렌지색의 두께 6밀리미터 황마로프를 선택했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 그럼 대체 ‘성인밧줄플레이’는 뭘까 궁금해졌다. 놀이밧줄이나 밧줄플레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어, 그런데 아닌 것 같다. 19금 표시가 줄줄이 달려있는 걸 보니. 놀이밧줄과 밧줄 플레이, 그게 그렇게 다른 말인가? 19세 미만을 접근금지 시켜야 할 정도로. 나야 19금 밧줄을 구입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상관이 없지만 성복은 그렇지 않았다. 성복은 의사역 소품으로 맥심 두 권을 주문했는데 센스없는(?) 택배사에서 교수실 문 앞에 떡 하니 놓고 가버렸다. 반나절 넘게 문 앞에 놓여 있던 그 잡지를 본 수많은 학생들-여대여서 더 얄궃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본인은 모르지만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는 맥심을 두권씩이나 정기구독하는 ‘맥심 성복’으로 소문이 쫙 퍼졌는지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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