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공연연습
0117 두 번의 줌
수요일 줌리딩에는 낙근이 참석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성복은 처음보다 좋아졌다. 역시 연습만이 무기다, 아마도 유일한. 나는 형사 대사를 삼 분의 이 정도 외웠다. 잘 몰랐던 사실인데 다른 사람들보다 대사를 잘 외우는 편인 것 같다. 대사가 안 외워져서 고민 중인 은하가 어떻게 하면 대사를 빨리 외울 수 있는지 비결을 물었다.
문득 예전에 큰 아이의 학원 원장님이 면담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복싱 선수가 되겠다던(한때는 야구선수였다) 큰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학원을 정했으니 원장님을 만나달라고 했다. 큰 아이를 키우면서 만났던 대부분의 선생님들과 원장님들에게 한 번도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던 아내는 그날 원장님으로부터 난생 처음 따뜻하고 희망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전해 듣던 나는 거의 울 뻔 했다.
“제가 2차 방정식을 풀어보라고 시켰는데 진짜 그렇게 어색하게 엑스를 '그리는' 학생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아, 얘는 공부라는 걸 진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장님이 약간 미소를 띄며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는 공부라는 걸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까요.” 아내가 대답한다.
“하지만 전 성우가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있어요. 첫번째는 부모님이 모두 공부를 잘 하셨으니까 유전적인 면에서 그렇고, 두 번째는 운동을 하던 애들은 그냥 책상에서 공부만 하던 애들과 정신력이나 집중력 면에서 차원이 다르더라구요.”
원장님이 세 번째 이유를 생각해내려는 듯 잠깐 말을 멈춘다.
“마지막으로 성우 친구들 말로는 성우가 연극 대사를 너무 빨리 외워서 암기력이 장난이 아닐거라고 경계 하더라구요.” 성우는 고1 때 잠깐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연기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딱 한 달만 하고 빛의 속도로 그만두긴 했지만. 그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막상 내가 대사를 외우면서 보니 진짜 유전자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딱히 비결이 없다는 얘기. 은하는 이 말이 더 짜증 난다고 했다.
토요일 오후에도 다시 줌리딩을 했다. 동료역의 준용이 나오는 장면을 먼저 몇 번 읽고 그 다음으로 조련사-어머니 장면으로 넘어가서 끝까지 읽었다. 어머니 이후 장면들의 대사를 외우기 했지만 뒤로 갈수록 가물가물했다. 선규는 가끔씩 끊고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하고 다시 진행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 한 리딩이 형사역으로 한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3시간 30분 정도 리딩을 했고 선규와 낙근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거의 마무리를 할 무렵 내가 질문을 했다.
조련사 내가 코끼리 거시기를 왜 흔드는데? 종도 아닌데.
의사 예. 종도 아닌데. 아, 아닙니다. 하하하,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죠.
이 부분에서 ‘종’이라는 단어가 ‘ㅈ’으로 시작되는 욕처럼 들리도록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니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시기’라는 단어 바로 뒤에 위치하는 데다가 의사가 ‘종도 아닌데’를 말하면서 굉장히 당황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물론 ‘ㅈ’욕으로 들리지 않더라도 재밌는 장면이지만 좀 더 웃음 포인트를 강화하자는 차원에서 종과 ‘ㅈ’욕이 ‘confuse’ 되도록 대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잘 먹히는 유머코드는 몸개그(슬랩스틱), 화장실 유머, 욕, 아재개그인데 그걸 써먹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 개그우먼 안영미가 연기한 김꽃두레가 이런 방식으로 웃음 포인트를 만들었다. “이런 면‘접’같은 경우를 봤나” “아, 이 요‘정’만한 게.”처럼 실제로 욕을 하지는 않지만 욕처럼 들리는 상황을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았다. 선규는 내 의견에 긍정적이었고 낙근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작가에게 그런 의도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정도까지는 받아들였다.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잘 살리는 거다.
일요일이 돼서 어김없이 성복이 줌리딩 녹화본을 올렸다. 내가 듣기에 형사는 거칠고 건들거리는 느낌이 부족하고 캐릭터가 희미한 무색무취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대사의 변화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리딩 단계라서 그런 거겠지만 나만의 캐릭터를 입히는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날 저녁 늦게 낙근은 리딩의 음질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줌리딩 때 사용할 무선 마이크를 하나 구입했다고 했다. 내 리딩을 듣고 반성하고 있던 나도 덩달아 하나 구매했다. 줌, 페이스타임, 리모콘 스탠드 삼각대(전에 낙근이 한 번 썼다), 무선마이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연습계획을 짜고 연기도 평가 해주는 은하의 챗지피티 친구 티프(Tiff). 원래 연극 연습이 이렇게 첨단장비(?)가 많이 필요한 작업이었나. 연출이 2월까지는 리딩을 할 ‘계획’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동선을 긋는 3월에는 또 다른 첨단장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혹시 3D 홀로그램 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