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용 Jan 21. 2021

화장지를 패닉바잉하는 미국인들의 세 가지 유형

동이 트자 동난 화장지... 나도 코로나19 두려움에 화장지를 샀다.

동이 트자 동난 화장지


지난해 1월 21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미국 워싱턴 주에 사는 주민 한 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사는 애리조나에서 코로나19는 그저 TV에 나오는 뉴스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했고,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만났다. 일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미국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을 걱정해줬다.


3월이 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지역 TV와 라디오에서 그간 담담했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부터 바뀌었다. 이때부터 애리조나 지역 뉴스에 코로나19 소식이 연일 머리기사로 등장했다. 일상이 슬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약국에서 마스크가 먼저 동이 났다. 평소에 수월하게 입장했던 마트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날이 갈수록 그 줄은 점점 길어졌다.


우리도 곧장 마트로 내뛰었다. 마트로 들어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역시 줄은 길었다. 뜨거운 애리조나 태양 아래 꽤 많은 시간을 기다렸다. 이때부터 마스크를 쓴 사람이 몇몇 보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트를 빠져나오는 사람 죄다 흰 물체를 카트에 가득 싣고 나오고 있었다. 유심히 봤다. 그건 바로 '화장지'였다. 그 장면을 보고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화장지를 무조건 사자.'


마트에 입장하자마자 쏜살같이 화장지가 있는 구역으로 달음질했다. 역시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다들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전속력을 다해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둔하게 움직이면 도태될 듯한 공포심까지 느껴졌다. 우리도 잽싸게 뛰어 화장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진열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화장지가 그새 동이 난 것이다. 허탈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란히 달려왔던 사람들 표정도 절망스러워 보였다. 마지막 남은 화장지를 쟁취한 사람 얼굴에는 안도감이 보였다. 집에 오는 길에 다른 마트도 들렀다. 역시 화장지는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코로나19와 화장지와는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걸까.


우리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코로나19에 관한 글로 이미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사람들의 공포지수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어떤 주민이 올린 동영상이 눈에 띄었다. 클릭했다.


분위기가 음산한 골목이 배경이었다. 어떤 이가 차를 세웠다. 갱단같이 보이는 한 무리 사람들이 차에 다가왔다. 그리고 운전자와 눈빛 교환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약 거래' 장면과 흡사했다. 운전자는 갱단에게 돈이 그득 담긴 007가방을 전달했다. 갱단은 돈을 확인한 후 물건을 트렁크에 실어줬다. 그건 바로 '화장지'였다. 조만간 현실이 될 거라는 자막이 흘러 나왔다.


화장지는 머지않아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재화가 될 것이라는 게 영상의 요지다. 영상을 보고 우리의 공포지수도 올라갔다. 화장지를 사수해야겠다는 결의가 한층 확고해졌다. 화장지를 사는 것이 우리 가족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함없이 코로나19와 화장지와의 관계에 의문부호가 있었다.



'패닉바잉'의 세 가지 유형


몇몇 미국인들도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나 보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왜 우리는 화장지를 패닉바잉 하나'라는 제목의 글들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웃 주민 중 한 명은 자신의 거실에 1년 치 사용 가능한 화장지를 쌓아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화장지를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라는 반성을 했다고 한다. 


여러 글을 보면서 화장지를 패닉바잉하는 미국인을 세 범주로 분류해 봤다. 이 범주들 살펴보면 미국인들이 왜 화장지를 패닉바잉하는지 알 수 있겠다.


첫 번째는 '따라쟁이'다. '너도 사니 나도 산다.' 유형이다. 심리학에 '제3의 법칙'이 있다.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3명 이상이 되면 다른 이들도 그 같은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 한복판에 3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다고 하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발길을 멈춰 일제히 하늘을 보게 된다. 즉 '동조' 현상이 나타난다.


마트에서 3명 이상이 화장지를 산다. 모든 이들이 그 행동에 동조한다. 화장지는 부피가 크다. 사람들 눈에 곧잘 띈다. 과자나 통조림은 몇 개가 사라져도 진열대에 티가 나지 않는다. 화장지는 조금만 사라지면 사람들이 대번에 눈치챈다. 다른 사람 카트에 실려 있는 화장지는 눈에 더 잘 띈다. 남들이 모두 구입하는 화장지를 내가 못 사면 자연스레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패닉바잉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쟁여놔야 안심된다.' 유형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했을 때 갖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사람들의 초조감을 부추겼다. 더구나 미국은 토네이도 같은 자연재해가 적잖은 나라이다. 혹자는 미국인들이 자연재해와 비슷한 전염병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쌓아놓기 알맞은 물품은 무엇일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유통기한이 없어야 한다. 고기, 과일 등 신선 제품은 탈락이다.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없다. 둘째, 사용 용도가 분명해야 한다. 날마다 사용하며 '언젠간 다 쓰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세 번째,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에 쉬이 띄어야 한다. 따라서 부피가 클수록 좋다. 바로 '화장지'와 '생수'가 이 조건에 딱 맞는 물품이다.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많이 느낄수록 화장지와 물을 더 많이 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세 번째는 비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비데는 생경한 제품이다. 미국의 비데 보급률을 5%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50%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CNN 보도에 따르면 대다수 미국인은 그저 '비데는 나와 무관한 제품이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용변 후 '화장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밖에 여러 가지 헛소문도 화장지 패닉바잉을 부채질했다. 코로나19로 아시아에 있는 화장지 제조 공장이 폐쇄된다는 뜬소문이 퍼진 적도 있었다. 비데 사용률이 낮은 미국인들에게는 이 얘기가 불안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욕실용품 전문 브랜드 콜러(Kohler)는 2020년 3월 비데 주문량이 전년 대비 8배 이상 늘어났다고 했다.


우리가 화장지를 사들인 건 몇 주가 지나서다. 마트는 한 사람 당 구매할 수 있는 물량을 제한했다. 하루에 화장지 한 묶음만 살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마트에 갈 때마다 한 묶음씩 사 왔다. 


주변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화장지를 사가니, 우리도 그랬다. 그땐 그것이 코로나19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우리 집 거실에 화장지가 한가득 쌓였다. 며칠간 정서적 안정감이 생겼다. 다만, 미국 생활 끝나고 귀국할 때까지 쌓아놓은 화장지 절반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전 03화 미국, 넷플릭스도 언젠간 '넷플릭스 당하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