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완벽주의자’만 하기.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이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겠다고 한다면, 글쎄,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눈썹을 잔뜩 찡그리거나,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먹이거나, 기도하듯 간절히 두 손을 모으는 제스처를 해 보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최선을 다해 항변하겠지.
난 내가 게으르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글쓰기에 한정이지만.
어쨌거나.
'게으르다'.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구나 대번에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머릿속에 떠올리신 바로 그 이미지들 말씀입니다.)
바로 그 이미지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러므로 나는 '완벽주의자'되 게으르진 않다.(이게 보편적으로도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진짜로 그렇게 바란다.)
자, 그럼.
지금부터는 변명을 해보겠다.
한 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줄로 변명을 할 테니 참아주시라.
변명 한 줄 읽는 게 그렇게 소모적인 일은 아닐뿐더러, 그 정도의 시간은 빌 게이츠에게도, 화성으로 가겠다는 어떤 괴짜이자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공식적) 인류 최고의 부자에게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벌써 여기까지 흰소리나 줄줄 늘어놓고 읽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무슨 소리냐, 라고 생각하신다면, 글쎄, 미안합니다.)
변명: 나는 꿈조차도 현재 쓰고 있는-또는 써야 하는-글과 관련한 것을 주로 꾼다.
어디 그뿐인가.
'꿈 일기'라는 제목으로 몰스킨 라지 사이즈 노트 한 권(무려 34,000원짜리 노트다! 이것에 관해 설명을 구체적으로 할수록 내 편이 많아질 것 같지만 일단 한 줄짜리 변명이라고 했으니 여기서는 쓰기엔 양심에 찔리고, 그러니 아래에 따로 쓰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괄호라는, 글쓰기에 있어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또는 치트키라고까지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사한 장치를 이용하여 이 글을 이렇게까지 늘려버렸답니다. 짜잔. 이건 글 쓰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특혜이자 마법이라고 할 수 있죠. 제 전지전능과 마법이 부러우면 당신도 당장 글쓰기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신 또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답니다. 그리고 괄호가 길어질수록 문장이 읽기 어려워질 테지만, 뭐, 이미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앞서 말했던 '소모적인 일'에 거부감이 조금 덜한 분들일 테니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뒤로 글을 편하게 쓸 수 있을 테니까요.)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는 참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잠을 잘 때도 글 관련 꿈을 꾸고, 그 내용을 노트(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려 34,000원짜리!)에 기록한다.
2. 아침에 일어나 남아있는 수면제 기운에 비몽사몽 하면서도 노트(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 이하 생략.)부터 펼치고 펜부터 잡는다.
(이때 하도 많이 졸아서 노트가 쭈글쭈글해진 것은 우리만의 비밀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는 노트라는 물건이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내었지요. 과학이란 이렇게 가깝고 쉽답니다. 당신도 도전해보시길.)
3. 양치나 샤워를 하다가도 좋은 생각이 나면 메모하기 위해 욕실에 노트와 펜을 항상 비치해둔다.
(노트가 물에 다 젖을 텐데 무슨 이런 정성 없는 구라를 치냐, 라고 생각하셨다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남으실 때 인터넷에 'rite in the rain'이라고 검색해보시길. 참고로 펜은 아무거나 유성 잉크를 사용 볼펜으로 쓰면 걱정 없답니다. 필기구 강박증 환자로서 조만간 필기구 관련 글도 업데이트할 것이니 기대해주시길.)
4. 매일 하루에 최소 5~6시간은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다. 뭐가, 어떻게 되든.
(이 행위가 남기는 것은, 곧 버려질 약간의 활자 덩어리와 우울감을 증폭시킬 정도로 뻐근해진 척추, 그리고 카페 사장님의 이익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밖에도, 쓰자면 끝이 없지만 이쯤 하자.
원래 자기변명과 자기혐오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주절대게 뒀다간 패가망신하기 전에 자가망신부터 하게 만드는 아주 악독한 놈이니까.
저 악독한 두 놈은 일단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곪은 정신에는 건강한 신체가 깃들 수 없다지 않는가. (아, 반대인가? 뭐,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나한테는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에게 한소리 듣기 딱 좋다.
그리고 이럴 때 나오는 한소리는, 일반적일 상황에서와는 다르게, 그 관계를 파탄 낼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밖에.
내가 나를 깎아내리니 보는 입장에선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하는 것일 테고, 참다 참다 나온 그 한마디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폭발력에 안 그래도 한없이 흔들리고 있는 나는 견디지 못하고 폭사 당하는 것이다.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 뼛가루는 웬만하면 그냥 길거리에 뿌려주시길. 부끄러움 많은 인생, 한 조각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군중 속에, 평범한 복장을 하고 숨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제 뼛가루는, 지금은 홍대입니다만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거리에 몰래몰래 뿌려주시길. 아, 혹시 마약으로 오해받게 되신다면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사과를 전합니다.)
아무튼.
변명이 길어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이 글의 목적은 결국 "완벽주의자 탈출" 선언이다.
정확히는 ‘완벽주의로 인한 글쓰기 강박 탈출 선언’쯤 되겠다.
완벽을 위해 설계만 주야장천 하다가 정작 써야 할 글을 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제서야, 너무 늦게 말이다.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다.
아니, 사실 돌아갈 길이야 과거로 시간여행을 의미하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있다.
정정한다.
이대로면, 이젠 나아갈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다짐을 남긴다.
앞으로 모든 글을 막 쓰겠다.
거칠게, 솔직하게, 마음 편하게 먹고, 손 가는 대로, 막.
다짐의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앞으로 글이 거칠어지거나 논란 요소가 들어간 글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단 쓸 생각이다.
거칠게, 솔직하게, 마음 편하게 먹고, 손 가는 대로, 막.
영어로 바꾸면 그 뭐냐, 유명한 말 있잖은가.
(당연히들 아실 테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이건 나이키 사의 슬로건 'Just do it'의 오마주다.
만에 하나 표절 시비가 걸린다면 방금 바로 위에 쓴 저 한 줄의 문장이 승리의 신이 되어 내 편에 설 것이다.
나는 '이것은 오마주'라고 확실히 밝혔으니까.
활자 몇 개의 조합으로 세계 최대 대기업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성비라니. 놀랍지 않은가?
이래서 인생은 유비무환이라 했다.
나에게는 유비(유비무환의 유비가 그 유비가 아닌 건 저도 압니다. 이걸 바로 언어유희, 펀치라인이라고 하죠.)도, 전설적인 전략가인 제갈공명도 없지만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
이 덕분에 자기 혐오라는 악독한 놈도 조금 제압한 기분마저 든다.
꼴랑 문장 한 줄이 대기업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고, 정신의학적으로도 치료제가 된다.
이것이 글쓰기의 마법이다.
어떻게, 이젠 조금 설득당하셨습니까?
*깨알 상식: 나이키의 nike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따왔다. -> 뭐야, 얘네들도 어디서 가져다 쓴 거네. 그것도 슬로건보다 더 중요한 이름을, 한 글자도 안 바꾸고 말이야. 자기들부터 그래 놓고 나한테 표절 시비를 걸면 승리의 신께서 노하실 것이니 각별한 유의 요망한다고 전함.)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선전포고다.
이 이상 이대로 글감을 머릿속에서 썩히기만 하면 문예창작 전공(그것도, 믿거나 말거나, 교수님에게 편애를 받아 삼계탕 종종 얻어먹고, 소개로 과외 교습도 해서 두 자릿수의 학생을 합격시켰다. 이것 참, 믿거나 말거나다.)이라는 타이틀과 20대 후반이라는 사회적 책임감에 짓눌려 죽어버릴 것 같으니 도리 없다.
내 목숨이 먼저지, 자존심이 먼저겠나.
그럼.
함께 "게으르다는 소리를 듣기엔 억울한" 완벽주의자에서 탈피해봅시다.
지레 겁먹지 말고, 마음 편히 먹고, 손 가는 대로,
-절취선-
여기서부터는 첨부.
제목은 몰스킨 노트에 관한 이야기.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해야지.
그동안 다양한 노트를 사용해봤다.
워낙 필기구에 미쳐있는 인간인지라 한 번 살 때 2개씩 사기도 한다. 혹시나 불량품이 걸리면 기분이 나쁘니까. (그럴 때 기분은 하루 이틀만 나쁜 게 아니라 그 노트를 쓰는 내내 나쁘다. 그 문제는 결코 작지 않다. 노트를 처음 쓸 때, 첫 장을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필기구를 사러 가면 한 물건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기 일쑤다.
이 또한 혹시라도 내가 모를 하자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오는 행동, 일종의 강박증이다.
아무튼.
그럼 이제부턴 몰스킨 노트에 관해 알아보자.
!주의!
전문가는 아니므로 여기선 자세하게 다루지 않음.
소프트 커버는 재질 상 하드 커버보다 가볍고, 이름 그대로 소프트하다. 이리저리 잘 휘어진다. 오랜 시간 사용하다 보면 내 생활 습관에 맞춰 해지고 닳는 매력이 있다. 단, 하드 커버와 달리 소프트한 친구이기 때문에 흠집 등에 민감한 분은 피하시길.
+ 가볍고 얇은 특성으로, 들고 다닐 메모 및 수첩 용도로는 소프트 커버를 추천한다. 단, 손에 들고 다니며 그림 따위를 그리기엔 너무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친구라 어울리지 않는다. 주로 책상 위에 두고 쓰는 사용자에게 적합하다.
하드 커버는 무겁고 단단하다. 그리고 견고하다.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단단한 커버가 내용물을 지켜준다. 그야말로 터프하고 하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내용물을 오래, 안전하게 관리하고 싶은 사용자에게 추천한다. 예로, 나는 일기장용으로 사용한다. 또한 들고 다니며 쓰기에도 단단한 커버가 도움이 된다.
+단, 단점 또한 무겁고 단단하다는 것. 가장 작은 포켓 사이즈라도 뒷주머니나 상의 안주머니에 넣기 애매하다. 코트 주머니 정도에나 무리 없이 들어가는 수준이랄까. 주로 책상에서만 사용한다면 굳이 하드 커버를? 이라는 생각이다.
몰스킨 노트. 가격은 시중에 판매하는 노트류 중 거의 최상위권이다. 노트 계의 에르메스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그러나 종이의 질은 비판을 많이 받는다. 모든 종류의 내지를 사용해본 결과, 만년필은 무조건 뒷비침이 발생한다. 수성펜도 마찬가지. 심지어 중성펜 중에서도 에너겔 등의 제품에는 뒷비침이 발생한다. 아니, 뒷비침 수준이 아니라 종이가 잉크에 뚫린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덧쓰거나 잉크 조절을 좀만 잘못하면 뒷장에까지 배겨 나오는 수준이다. 종이의 질을 중요시하는 분은 구매를 삼가시길.
단, 오해가 있는데, 몰스킨 노트는 기본적으로 "종이가 잉크를 흡수하여" 그 내용을 보존하는 방식을 채택한 제품이다. 즉, 보존성에서는 좋은 종이라는 뜻. 그러므로 보존성을 중요시하거나, 뒷비침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분에게는 추천할 만한 노트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스킨의 감성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뒷비침은 용서할 수 없다!" 하는 분께는 수채화 용으로 나온 제품을 추천한다. 가격이 오리지널 제품보다 비싸며, 종이가 두껍고 거칠다. 해당 제품을 스케치북으로 사용하는 디자이너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많다.
<펜과 몰스킨 종이와의 궁합 간단 정리>
1. 유성 볼펜
-제트스트림, 아크로볼, 모나미 제품군 등 대부분의 유성 볼펜
2. 중성 펜
-유니볼의 대부분의 제품군(시그노, 유니볼 원 등), 사라사(두께에 따라 다름. 0.4mm까지는 문제없는 편), 에너겔(0.4mm까지는 문제없는 편), 하이테크(애매하다... 비추천) 동아 ~노크 시리즈(모든 제품에 뒷비침이 살짝 있다.)
3. 위의 제품들 이외의 모든 만년필과 수성펜(유니볼 아이, 비전 엘리트, 모나미 플러스펜 등.), 붓펜, 아무튼 수성 잉크를 사용하는 펜이라면 전부 종이가 뚫린다고 보면 된다.
플레인(무지)
라인(유선)
스퀘어(모눈, 격자)
도트(점)
레이아웃엔 이렇게 4가지 종류가 있다. (먼슬리, 위클리 등 플래너 용도로 나온 제품은 다루지 않음)
각 레이아웃의 장단점을 간단히 살펴보자.
-플레인(Plain = 무지)
장점: 자유롭다. 그림 그릴 때 걸리는 것이 없다.
단점: 가이드라인이 없다 보니 글씨가 개발새발 될 가능성이 높다.
*추천 대상: 그림을 자주 그리시는 분, 가이드라인이 없어도 글을 반듯하게 쓸 수 있거나 반듯함에 신경 쓰지 않는 분, 자유로움을 선호하시는 분
-룰드(Ruled = 유선)
장점: 레이아웃의 강제성으로 인해 글씨가 위아래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단점: 가장 엄격하다고 볼 수 있는 레이아웃의 강제성으로 인해 사용하다 보면 답답할 수 있다. 특히 몰스킨은 줄 간격이 6mm(보통 공책은 7)라 더욱 갇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추천 대상: 줄글 위주의 기록에 집중하시는 분, 글씨에 자신이 없으신 분,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신 분, 글씨를 작게 적으시는 분.
-스퀘어(Squared = 모눈, 격자)
장점: 라인보단 자유롭고, 무지보단 강제적인 중도파. 글쓰기 연습 및 필기 노트를 정리할 때 좋다고 한다. 또한 건축, 산업 디자인 등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단점: 아무래도 레이아웃이 있다 보니 강제성이 부여된다. 자유로워지기까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추천 대상: 건축 및 산업 디자인 등 디자인 스케치를 원하는 분, 필사 및 노트 정리 등 정갈한 글쓰기를
원하는 분.
-도트(Dotted = 점)
장점: 모눈의 각 모서리를 점으로만 표시해놓은 것이라 자유롭다.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위에 설명한 3가지의 레이아웃의 장점만을 모아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개인적으로 시행착오 끝에 정착한 것이 이 도트 내지이다.)
단점: 스퀘어(모눈)만의 장점도, 라인 만의 장점도, 무지 만의 장점도 없는 애매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점이 인쇄되어 있는 부분에서 가끔 잉크가 스키핑(묻지 않는 현상) 되는 일이 발생할 때가 있다. (특히 중성 잉크에서 심하다.)
이 정도면 몰스킨 노트에 관해 꽤나 적었다고 생각한다.
이밖에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이나 어떤 방식으로든 따로 연락해주시길 바란다.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변해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