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는 사건이 아니다.

'참사=당연히 추모해야 하는 것'이라는 공식의 비공식적 공식성의 관하여.

by 문지음

2022년 12월 10일 17:15.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다.


지금 이 시간에, 키보드 위 내 손가락의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평소라면, 관용어처럼, 익숙하게,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따위의 문장을 썼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겁이 나서 그렇고, 걱정되어 그렇다.

'놀리다'라는 단어에는 어쩐지,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가볍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생각 없이 쓴다'라는 어감이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쓸 글은 그런 표현을 쓸 만한 내용이 아니다.


얼마 전, 우리에게 다들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친 '이태원 참사'에 관한 글을 쓸 것이므로, 나는 겁이 나고 걱정되는 것이다.


'참사'는 쉽게 풀이하자면 '참혹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위의 문장을 쓰면서도 나는 '쉽게 풀이하자면'과 '편하게 풀이하자면' 중에서 무엇을 쓸지를 약 26분 간 고민했다.


'참사'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이 무겁고, 또 무섭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라면, 게다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마음 한켠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26분 간 고민한 것이다.


26.


지금은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무게에 비하면, 이 숫자는 충분히 길거나 크다고 느껴지지 않아 죄스러운 기분마저 든다.


'참사'.


이 표현은 사전에 올랐을 하나의 단어로서 올릴 때나 '쉽거나' '편하게' 풀이할 수 있다.


그것이 사전의 바른 기능이니까.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관해 말할 때는, 적어도 나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굳이 이런 글을 왜 쓰겠다고 나서서,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어떤 사건 실제로 발생했고, 그 내용이 참혹하다면, 그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입과 손은 쉽거나 편할 수 없다.

노파심에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것이다.


사건과 참사가 서로 구별되어 각각의 단어와 풀이로 사전에 등재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일 터다.


그런 이유로, 사건에 관한 말이나 글은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하거나 쓸 수 있으나 참사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쉽거나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볼 때 나는 슬프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 젊은이들이 모였다.


세계에 역병이 돌아서, 웃거나 웃을 때 남들에게 표정을 가릴 수 있고 또 가려질 수밖에 없던 3년이었다.


그러니 인생에서 가장 생동감으로 충만할 청춘들은, 얼마나 답답하였겠는가.


생동감이란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살아있음의 증거는 감정을 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무감정이든, 그 모든 건 감정이며, 청춘은 감정이 가장 강한 생명력으로 박동하는 시기이다.


즉 청춘은 가장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런 청춘들이 3년을 자신의 반만 보여주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장장 3년 만에 남에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울고 웃어 보일 수 있는 때를 맞이했으니 얼마나 설레고 기대됐을 것인가.


나이를 먹으며 육체와 감정이 같이 닳아가는 나로서는 나도 지나쳐왔을 청춘, 그 시절의 감성을 떠올리며 막연히, 그저 막연히만 '그런 걸까?' 하고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 102명의 여성과 56명의 남성 피해자들, 그리고 그밖에 부상자와 그 광경을 목격한 청춘들의 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망자 명단 공개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해서 또한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함부로 쓸 수 없다.


다만 쓸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날 청춘들은 죽었다는 사실이다.


육체가 죽은 청춘들, 그 광경을 목격하거나 그 참사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 마음이 죽어버린 청춘들이 있다.


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되 간접적으로 참사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죽어버린 청춘들도 있다.


그러므로 102명의 여성과 56명의 남성 피해자, 즉 158이라는 숫자는 정확하겠으나 틀렸고, 158만큼 무겁고 버겁겠으나 그보다 더 무겁고 버거울 것이다.


여기까지 적었으니 한 마디를 덧붙여야겠다.


나는 이태원 참사에서 죽은 청춘들과 청춘들의 청춘들을 가슴 아파하지만, 타인에게도 그래야만 한다고 얘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방금 전 문장에서 '죽은'이라는 표현을 쓸 때, 앞서 내가 '쉽다'와 '편하다' 사이에서 26분 간 고민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죽어버린’을 고른 것 또한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죽어버린'과 '죽은'은 무엇이 다르고, 왜 나는 이것에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는가.


'죽어버리다'에는 감정이 담겨있고, '죽다'는 사실의 서술이다.


'죽어버리다'에는 '어찌 저찌 하여 결국', '어떻게 생명이 이런 식으로'와 비슷한 감정들이 실려있다.


'죽다'에는 감정이 없다.


나는 이태원 참사 소식에 심장이 움직이므로 고민 없이 '죽어버린'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죽은'이라고 쓰는 사람을 보아도 탄압하거나 박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느끼는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영역이다.


마음을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 국가에서조차도 ‘마음‘을 ’강요‘할 순 없었다.


그저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탄압하고 박해했을 뿐이다.


짖는 개한테 개짖음 방지 목걸이를 씌운다고 개가 안 짖는 게 아니다.


개는 속으로 짖는다.


다만 개는, 짖음 방지 목걸이의 전기 충격이 두려워 소리내어 짖지 않을 뿐이다.


짖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하기 전까지, 개는 짖는다.


애도를 강요하는 것이 이와 다르지 않다.


애도할 마음이 들지 않거나 비교적 적게 들거나 자기 일처럼 애도하는 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요구하고, 그렇게 해서 요구한 바대로 그들이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애도일 것인가.


오히려 그 강요로 만들어진 곡소리에 정작 죽어버린 청춘들의 비통의 소리가 묻혀버릴지는 않을까,를 나는 노심초사한다.


또한 '죽은'이라고 쓴 이라 하더라도 그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만을, 최대한 담담히 서술하여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애도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만이 알고 있고, 자신조차도 자신을 모를 때가 많다는 말은, 이제 어떤 불분명하게 중얼대는 주문처럼 들릴 정도로 힘이 없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믿으므로 나는 '죽어버린'이라는 표현을 쓸 때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죽어버린'이라고 쓰는 나와, '죽은'이라고 쓰는 어떤 이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고 여길 뿐이다.


희생자, 정확히는 피해자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정확히 부른다고 해서 애도가 깊고 진정성을 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책임 없이 깊다.


차라리 슬프지 않아서 슬프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러한 방식으로 애도를 하려면 피해자의 숫자(특히 대부분의 언론에선 사망자 수만을, 대략적으로 언급한다.)를 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살아온 내막을 엿보려고 하며, 그 삶이 붕괴됐음을 내 죽음처럼 두렵고 아파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것이라면 숫자 세기는 그만두고, 각자 나름의 방식과 깊이대로 애도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깊이와 방식, 애도함과 애도하지 않음을 탓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연신 싸우는데, 나에게는 그 행태가 싸우기 위한 싸움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강렬한 슬픔과 비통을 표출할 곳을 찾지 못한 이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 타깃을 찾은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 슬프지 않거나 안타깝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슬프지 않거나 안타깝지 않은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맞받아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그들의 싸움은 죽어버린 청춘들을 목적해 있지 않다.


그들은 각자 싸울 뿐이다.


그 싸움은 죽어버린 청춘들을 목적해 있지 않으므로 정확한 애도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나 또한 내 방식의 애도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골방에서 홀로 애도한다.


기도를 길거리 복판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서 홀로 하라던 과거의 어떤 위대한 종교인의 말처럼.


청춘이 지나가버린 나이이고, 그래서 죽어버린 청춘들의 비통을 알지 못하므로, 남에게 들키지 않고, 나만의 애도를 숨기기 위해, 마음에 마스크를 쓰고서, 비겁하게.


겁 많고 비겁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지를 빌려 이곳에 몇 자 겨우 적는다.


이 글은 오탈자를 제외하곤 고쳐 쓰지 않는다.


퇴고를 하면 안 그래로 비겁한 내가 더 비겁해질 테고, 그러면 글은 위선적으로 변할 테니까.


누군가가 욕을 해도 기꺼이 얻어먹을 마음으로 이 글을 나는 썼다.


그것 또한 내 애도의 깊이를 내가 혼자서는 미처 닿지 못한 곳까지 닿게 해 줄 것이라고 믿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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