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관한 TV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우연찮게 TV에서 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곳에서, 토론자들은 ‘기레기’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 즉 기성 언론들에 관해서였다.
한쪽은 비판했고, 한쪽은 옹호했다.
언론을 비판하는 쪽은 옹호하는 자들에게 성을 냈고, 그 말을 들으며 옹호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목소리를 높
이며 언론을 변호했다.
성을 내는 쪽은 부정확한 정보 전달, 입맛대로 뺄 것을 빼고 넣을 것을 넣어 하는 보도의 편향성 등을 비판의 근거로 제시했다.
요는, 언론이 정보를 왜곡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대쪽 또한 자신들의 논리와 근거로 ‘언론 비판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의 싸움과 의견 대립, 그리고 이야기의 주안점 중 하나였던 일국의 전前 장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그들만큼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느낌.
정보, 왜곡, 부정확, 편향, 보도, 그리고 언론.
그런 단어들을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높고 찌르는 듯했으나 공허하게 들렸다.
프로그램에 자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요즘은 TV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어 통역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알 권리’에 관해 언성 높여가며 이야기했는데, ‘알 권리’ 앞에 ‘제대로’가 붙어야만 그것이 가치 있는 토론 거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알 권리’를 쓰다듬으며, 그 주변을 우물쭈물 서성이는 ‘알 권리’는 거친 손길로 밀쳐내는 극성맞고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알 권리’란 무엇일까.
정확한 정보, 왜곡 없는 정보, 누군가의 임의와 이해관계가 끼어들지 않는 정보의 전달.
즉, 일종의 ‘고급’인 정보 전달.
그들이 1시간 동안 열띤 채 말하고 있는 게 이것이었다.
고급은 물론 좋다.
정보 전달이든 음식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지, 분에만 맞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알 권리’에 관해서만큼은 이것을 적용해선 안 된다.
정확히는, ’알 권리의 보장을 위한 정보 전달‘에서만큼은 말이다.
‘알 권리’애 관한 문제에선 고급이 있기 전 저급이 선행해야 한다.
‘제대로’ 전달하기 전에 ‘무조건’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알 권리란, 적어도 나에겐,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임의로 골라내거나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것은 언론의 존재 이유이자 의의이며, 알 권리의 ‘제대로’ 된 기능이자 의무다.
레거시 미디어, 즉 기성 언론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 의무를 마땅히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자막이 없는가?
왜 수어 통역사가 없는가?
어찌하여 저들은 ‘정보 전달’에 관해 저리 목소리 높여가며 열심히 논하면서 막상 소수자들에게는 정보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모두에게 ‘제대로’가 아닌 ‘무조건’ 알리지 않는가.
‘제대로’가 고급이라면 ‘무조건’은 '저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하가 아니다.
고급이 있기 전, 그 기본이 되는 저급이 있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정보 전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세련되게 가공해서 전달하든, 저들 입맛대로 자르고 기워서 전달하든, 그 전에 진정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정보 전달’ 그 자체이다.
이게 먼저다. 조건 없는 정보 전달.
즉, 무조건적인 정보 전달이다.
그들이 열띠게 읊어대던 (고급) 정보 전달은 이것을 확보한 이후에나 논할 수 있는 문제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의 진영 중 한쪽이 내내 하던 말을 짚어본다.
그 진영의 패널들이 가장 힘주어 주장한 것이 ‘국민들은 정보를 스스로 검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맞는 말이었고, 맞길 빌게 되는 말이었다.
토론이란 게 대개 이렇다.
말싸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긴 하지만, 의견 자체는 일차적 차원에선 대부분 옳다. (일부의 극단주의자
등은 배제한다.)
단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개념이나 내용을 언어로 잘 다듬지 못하거나 논증의 질이 허술하여 페이스에 말릴 뿐.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언론 옹호 측 패널들의 말이 나에겐 공허하게 들렸다.
아니, 찬반 진영을 막론하고 그 자리를 채운 모든 패널의 말과, 그 프로그램 자체가 공허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자들이, 그러한 주제로 토론 자리씩이나 마련하여 다투는 자들이, 어찌하여 자막과 수어 통역자는 마련하지 않았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알 권리’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하는 토론에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말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가.
약 한 시간짜리 토론을 보면서, 나는 무슨 가면무도회를 목격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패널들은 각자의 가면에 어떠한 표정을 조각하여 나온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인가.
권리란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
권리를 세울 때는, 그로 인해 피해를 볼 자들과 이익 또는 혜택을 얻을 자들의 의견을 신중히 듣고,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세워진 권리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고급’ 정보만이 아니라 ‘저급’(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비하가 아니다.) 정보라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알 권리뿐만 아니라 ‘무조건’ 알 권리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논리와 토론 주제, 그들이 하는 말은 너무나도 ‘고급’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정보 전달의 문제’는 소수자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는 ‘무조건 알 권리’가 아니었다.
'알 권리’. 영어로는 'Right to Know'.
영어 단어 'right'는 많은 뜻을 가진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오른쪽’, ‘옳은’, 그리고 ‘권리’이다.
앞의 두 가지 뜻이 서로 붙으면 고루하고 무식해 보인다.
마치 과거 ‘왼손잡이 기피 현상’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오른손이 옳고 왼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이 시대에선 이미 사장되었고, 만약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다면 완전히 사장되어야 마땅하다.
‘오른쪽’과 ‘옳은’은, 그렇기에 서로 붙으면 안 된다.
이 둘에겐, 비록 서로에게 견우와 직녀 같은 사이일지라도, 오작교가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오른쪽이 옳다’라는 주장은 가능할 때가 분명 있다.
이것은 ‘왼손잡이 기피 현상’과는 엄연히 다르므로 마땅히 살펴봐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은 (물리적) 방향의 문제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오른쪽이 옳을 수도 있다.
이것은 물리적 방향의 문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여기선 오른쪽으로 가는 게 옳아.’라고 말할 때, 길을 정확하고 알고 있는 자만이 그렇게 말을 해야만 유효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그 말을 듣는 자의 권리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물론, 또한 왼쪽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의견도 들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 개인의 의견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설령 틀린 말이라도 말이다.
의견을 내지 않은 사람도 그 자체로 ‘의견 없음’이라는 의견을 낸 것이니, 이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자유이고, 민주주의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수용이 아니다. ‘존중’이다.
수용과 존중은 엄연히 다르다.
부정확하거나 주관적인 의견까지 무분별하게 ‘수용’했다간 공동체는 파멸할 것이다.
존중하되, 수용은 합리적으로, 이성에 부합하게, 분별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다.
얘기 길어졌다. 돌아가자.
그렇다면 'right'의 마지막 두 가지 뜻, ‘옳은’과 ‘권리’를 살펴보자.
이 둘을 합치면 ‘옳은 권리’다.
이 단어는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다.
‘옳게 주장하는 권리’, 또는 ‘권리 자체가 옳다’.
전자는 덧붙이면 입만 아프다. 깊게 다뤄야 할 것은 후자다.
‘권리가 자체가 옳다’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권리’라는 것이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의견이던 시절에 과학자들은 처벌받았다.
여자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옳은 것‘이던 시절에, 여성은 인간이되 한 나라의 국민이 되진 못했다.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역사가 있을진대, 권리 그 자체에 대고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물론, 21세기 국가들에서 권리로 자리 잡은 것들은 대부분-일부 독재 정권 국가 등을 제외하면-이성과 합리를 통해 합의된 것들이니 ‘굳이 이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 필요가 있느냐’라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권리는 단단한 방패이며 동시에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기가 언제 방향을 돌려 이쪽을 향할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완전무결한 불변의 진리란 종교의 교리 안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옳게 주장하는 권리’는 어떨까.
당연히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옳게’ 주장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합의를 통해 이미 하나의 권리로서 자리 잡은 것을, 주장하는 방식까지 옳게 한다면 더 말해서 무엇할 것인가.
그렇다면, TV 토론 프로그램에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자막 삽입 또는 수어 통역자를 배정해달라는 주장은 주장 되어 질 수 있는 있는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이 주장은 청각장애인들의 ‘알 권리’를 보장할 몇 안 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장될 수 있다.
또한 이 주장은 청각장애인들이 ‘옳게’ 주장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막이나 수어 통역자를 요구하며 폭력 따위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아니, 사용할 필요도 없다.
이미 대부분의 방송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옳게 주장된, 옳은 권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과 ‘정보 전달’을 주제로 ‘토론씩이나’ 하는 프로그램에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 또는 무관심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위선이라면 징그럽고, 무관심이라면 무섭다.
전자라면, 그렇게 위선을 부리며 열띤 토론의 패널 역할과 언론사라는 배역을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징그럽다.
후자라면, 2020년대 민주주의 국가가 (소수자의) 권리에 그렇게까지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소위 ‘미필적 폭력성’이랄 만한 게 느껴져서 무섭다.
언론에 관해 ‘말하려는’ 자들은 ‘듣기’뿐만 아니라 ‘보기’까지 마땅히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저급 정보 전달’이다.
그것이 ‘무조건 알 권리’다.
그것이 기본권이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난 뒤, 주장하라. 그래야 진정성이 담긴다.
그것만이 레거시 미디어, 즉 기성 언론이 이대로 사장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선행되어야 할 길일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선행 없이 어찌 '정보 전달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