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
뉴욕에는 많은 인종들이 살아간다.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각색 인종들이 23년이나 산 지금은 그들과 내가 그렇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는다. 언어가 다를 뿐이지 문화와 사고방식 많이 비슷하다. 특히나 소수인종들은 더 하다. 음악선생으로 또한 음악치료사이기에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만나고 다문화권의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아마도 뉴욕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라서 그러한 것 같다. 뉴욕을 경험에 근거하여 소개하자면 내가 사는 아파트 빌딩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산다. 특히 아시안사람들 남미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 퀸즈에 살아서 어떨 땐 길거리에서 보이는 백인들을 보면 좀 신기할 때도 있다. 중국슈퍼에서는 리치나 다양한 중국과일 살 수 있고 일본밴토 도시락이 먹고 싶으면 일본 슈퍼에 가면 되고 한국배나 참외가 먹고 싶으면 한국슈퍼 HMart 에 가면 된다. 한 곳에 다 없어서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문화를 슈퍼에서도 느낄 수 있어 재미있다.
나의 학생들은 인도, 방글라데시, 그리스, 중국, 미국, 한국아이들이 있다. 당연히 그 아이들은 모두 다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나는 특별히 인도말이나 그리스어를 배워서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 알고 보면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모든 나라의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나는 가끔 아이들의 부모님에게 묻는다 그들의 문화는 어떠한지 어떻게 그들의 언어로 인사말을 하는지 물어본다. 그들의 문화를 궁금해하는 질문은 그들에게 정답게 다가가는 것 같다. 나도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물어보고 한국어로 인사할 때 알게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해진다.
토요일 밤 8시에 인도아이학생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나에게 생일파티에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 학생의 어머니는 유독 나를 초대하려고 몇 주 던부터 파티에 대해서 언급하고 초대장을 보내왔다. 아침부터 밤 8시까지 일을 하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낮에 사놓은 한국떡 송편을 사들과 작은 선물들과 함께 현대 투산을 타고 파티장에 갔다. 말이 파티장이지 그냥 학생집의 뒤마당이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인도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미스 하나!!!!!" 아주 높은 톤의 격양된 기쁨으로 나를 안아주며 반겨주었다. 인도학생엄마는 아마도 내가 여기에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는지 너무 놀래며 사람들에게 내가 왔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와줘서 고맙다고 저기에 있는 애피타이저를 먹어보라고 재촉하며 권유하였다. 내가 그냥 둘러보고 가만히 서 있으니 빨리 가서 먹으라고 사람들이 어른들이 재촉였다. 이런 모습들은 여느 한국인 어르신들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내가 가르치는 다른 인도학생의 가족들도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나도 나 자신이 여기 오기로 결심하고 여기에 있는 내가 자랑스럽고 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했지만 온 보람이 있구나" 귀에 우렁차게 울려지는 특이하고 이색적인 멜로디의 인도음악, 현란한 여성들의 인도전통 옷과 얼굴화장, 장신고리, 인도고유의 음식 냄새,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내가 가보지 않은 인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인도학생 아버지랑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유능한 IT계통의 인재로서 꽤 유명한 직장에 종사하며 코네티컷으로 3시간 동안 출퇴근을 하며 일을 한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먼 곳을 출퇴근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학생아버지는 최근에 그가 테슬라를 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율주행을 맞추어 놓고 자기는 3시간 동안 핸들을 잡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냥 버스를 타고 출퇴는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나는 놀라웠다. 그렇게 테슬라의 자율주행을 믿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있구나 하고 그의 결단에 대단하다고 하였다. 그의 아이들 중은 딸은 거의 7년을 가르쳤고 아들은 4년 정도 된 것 같다. 딸은 중증 자폐아이고 아들은 똑똑한 영재이다 아들은 걱정이 없고 딸을 많이 걱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딸아이의 행동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음악치료사인 나를 엄청 반기고 30분에서 40분의 음악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따랐는데 요즘에는 음악으로 나와 소통하기보다는 눈치를 보고 나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다.
이분의 딸아이 리따는 굉장히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몇 번 들은 멜로디나 노래는 바로 음정에 맞춰서 리듬에 맞춰 잘 따라 부르는 음악적인 아이이다. 9살이긴 하지만 언어소통은 단어로만 겨우 한다. 의사소통에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리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리따의 감정의 변화를 만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리따의 엄마가 말하기를 최근 이사를 오면서 학교나 선생님이나 복용하는 약과이사, 환경 등등 모든 게 바뀌어서 정서적으로 불안해하는 거 같다고 하였다. 자폐아이들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예상밖의 상황에서는 많이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행동적인 문제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자신이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적 행동을 많이 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어떤 일의 순서도 원래 대로 하는 그 순서를 따라가고 하나라도 바뀌면 그것을 똑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야 하고 그것이 되지 않을 때는 흔한 폭력을 쓴다던가 문제적 행동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고 보면 두려움이라는 것은 발달장애아이나 보통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우리의 내적정신에 스며들어 있어 우리를 컨트롤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발달장애아이들과 함께 한지 보통은 7년에서 8년이 되어 간다. 발달 장애아이들은 한 번 어릴 때 조기음악치료인터벤션을 시작하면 어떤 특별한 일이 있거나 이사 가지 않는 한 쭉 음악치료를 계속 이어 나가는 편이다. 나도 이 땅에서 이렇게 오래 살아갈지도 몰랐고 음악치료라는 것으로 아이들을 만나며 그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고군분투할지 몰랐다. 발달장애아이들은 완전한 치료나 완벽히 치료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소위 "다 나았어요"라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거진 10년간 음악치료사로서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본 결과는 결과물을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계속 나아지는 과정은 보여드릴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보통사람이 1분 만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발달장애아이들에게 비록 1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은 특별히 부모님은 그 결과에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제 이 아이들에게 잡혀버린 나는 아니 행복하게 잡혀버린 나는 이 뉴욕땅을 떠날 수 없게 된 건 같다. 7년 뒤 14년 뒤에 조금 더 나아질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