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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코끼리 Feb 28. 2022

오늘 나의 존재는, 엄마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여,

  

  "내 인생이 없는 것 같아.." 


  그녀가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다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왜 나는 진심으로 공감해주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그릇이 작았을까. 왜 나는 귀를 더 열어두지 못했을까. 나도 같은 엄마면서. 똑같이 육아에 온통 시간을 붙들려 살고 있으면서 왜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걸 이제야 생각한다. 


  나의 삶이라는 건 어떤 걸까. 내 인생을 산다는 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하루를 채워야 하는 걸까.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로 인해 알게 된 행복은 도저히 아이가 태어나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큰데도 왜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우울증은 계속되는 걸까. 그리고 나도 왜 자꾸 지치는 걸까. 

출처: 픽사베이

  육아를 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흐려졌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식사도 아이가 잠들었을 때, 혹은 혼자 놀 거나 하면서 나에게 시간을 줄 때 먹을 수 있었고. 내가 너무 피곤해도 잠들지 못한 아이를 위해서는 깨 있어야 했으며, 혹여라도 아이가 아프면 밤잠을 설쳐가며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먹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자다가 깨서 우는 아이를 달래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수유를 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서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니게 된다고 해도 눈 뜨자마자 등원 준비를 하고, 집에 와서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금방 하원 시간이 된다. 너무 사랑하지만 육아와 분리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지는데 코로나 시국이라 가정보육의 나날이 길어지면서 엄마는 항상 지쳐버리는 것이다. 


 육아에 있어 가장 힘든 점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자고 싶을 때 잘 수 없고,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없고, 내가 만나고 싶은 친구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만날 수 없으며, 보고 싶은 영화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 전화로 수다를 떠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아이는 더더욱 내 뜻대로 원대로 될 수 없다. 


  나는 사실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법 체력이 좋아서 다른 친구들은 지쳐도 나는 에너지가 남아돌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애들과 함께 부대끼다 보면 진이 다 빠져서 저녁이 되면 넋이 나가 있는 날들이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내 시간' 혹은 '내 삶'을 살아가는 느낌이 뭔지 흐리멍덩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치열하게 내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출처: 픽사베이

  등원 후 혼자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청소를 조금 미루더라도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아이가 잠든 시간에 홀로 집안일을 하지 않았고, 남편에게도 명확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을 넘겨주었다.(그때그때 시켰다) 엄마도 자신의 삶이 있고 그것을 어느 정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신랑도 출근을 할 뿐 그게 자기 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힘들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파트너니까)


  나 자신도 그렇게 치열하게 내 시간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면서도 그녀의 부고를 접했을 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첫 번째 생각은 "아.. 그 집 애 어떡하지... 짠해서 어쩌지..." 하는 거였다. 마흔도 되지 못한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제대로 피워내지 못한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아이가 받을 충격과 엄마의 상실이라는 무게를 아이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먼저였던 것이다. 남아있는 동반자에 대한 안쓰러움도,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가슴 아픔도 아니었다. 


  아, 이런저런 모든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제1의 정체성은 '엄마'구나.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을 엄마의 죽음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심란해졌다. 사실 처음엔 너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만약에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아팠다. 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얘네 두고 어떻게 눈을 감지....'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 사랑한 건 아이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를 지나 우리는 왜 우울해지는가. 그게 너무 미치도록 무겁게 나를 누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우리는 육아 파이팅을 외치며 서로를 격려한다. 역시 결론은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힘 내보자는 똑같은 말이지만, 그 안에서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너를 온전히 지지해주는 우리(육아 동지들)의 울타리를 더 든든하게 만들어서 쓰러지거나 주저앉은 사람에게 손 내밀 어가며 엄마인 나의 삶을 살아가야겠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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