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무게를 견딘다는 건 뭘까. 어쩌면 ‘외로움’과도 맥락을 같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에 보면 ‘Alone’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언급했다.
“전적으로 그 자신밖에 없는, 동행이 없는, 고독한"
그리고 뒤이은 문장은, “아빠는 릴리에게 사람이 혼자일 수 있는 그 모든 방식들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까"였다. ‘혼자일 수 있는 모든 방식’이란 아무래도 고독 혹은 외로움의 모든 방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언제나 홀로 견디는 일에는 그 무게만큼의 몫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나의 몫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몇 번,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기침(정말 기침 때문에 몇 주는 고생했다)은 오늘 내가 감당하는 외로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혼자일 수 있는 그 모든 방식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는지 떠올렸다. 없기도 했고 있기도 했다. 있으려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홀로 한밤중에 깨어 쉭쉭 거리는 유축기를 침묵 속에 돌려야만 하던 때, 아이에게 훈육을 해야 하는 상황에 어떤 적절한 단어를 골라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하던 때, 아파서 구토만 이틀째 하던 날 노란 쓴 물까지 모두 뱉어내며 견뎌야 했던 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흰 백지 위에 깜빡이는 커서만 우두커니 바라보던 때, 찬 바닥에 누워 나의 하루를 견뎌야 했던 가난한 이십 대의 청춘, 이십 대의 끝에서 우울의 날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몇 주의 몸부림, 나의 생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희망 없던 삶을 살던 삼십 대 어느 날,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지나온 외로움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견디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게 무척 행운 같은 일이다.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또 다른 무게가 나에게 주어졌고, 그 책임을 처음으로 감당해 내며 나아가고 있다. 어느 무게가 가장 무거웠느냐고 묻는다면, 그 짓누름이 가해졌던 그때그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언제나 과거보다 현재가 더 부풀리어 아픈 법이니까. 그래도 그땐 이렇게 견디었지, 저렇게 견디었지,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건 그 과거로부터 내가 멀어진 만큼 딱 알맞는 여유가 채워졌기 때문이다.
자폐아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그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인생 자체가 살얼음이 되었다는 친구 H의 하소연은 내가 알 수 없는 무게였다. H도 그녀 나름의 무게가 주어진 거겠지 생각하면 누구나에게 이런 짐 하나쯤은 있다는 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우리는 왜 사는 거지? 하는 질문에 딱 부러지는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 당신이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건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누구나 기다리는 고도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법이니까.
그렇게 답이 없는 무게는 각자가 인생에서 풀어내야 할 무엇이 되어 외롭지만 조금씩 이루어내고 있는 삶이 된다.